그리스도교는 부활을 즉 죽은 사람이 다시 생명을 얻어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 종교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부활시킨 그 하느님의 권능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도대체 보통 사람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있으며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해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불가능한 것을 믿는 정신 이상자처럼 생각해야만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교 신자는 부활을 믿는 것을 어렵게도 생각하지 않고 이상하게도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공공연하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축일로써 축하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인간적으로 가장 모순적인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정상적인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실상에 있어서는 인간은 본래부터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였으나 죽게 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정상적인 것이며 이렇게 해서 모순 속에 갇혀 살고 있는 인간은 해방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업적과 하신 교훈이 부활로써 완성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은 인류를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죄와 죽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같은 사물이다. 죄는 온갖 고통을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죽음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분석해 볼 때 언제나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는 직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은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될 것이며 또 죄를 범하지 아니한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고 또 바로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말씀으로 들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죽어야 할 인간인 예수님이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예수님께서 만일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죽음을 영영 처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인간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 죄와 죽음 그리고 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과 공포를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믿는 것으로써만 그칠 수는 없다. 부활을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앞으로 부활할 사람이라기보다 이미 부활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꼴로사이」의 신자들에게『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2장 8절)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부활한 사람이다. 그는 이제 묵은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人 중에 자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믿는 이가 과연 있겠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어떤 가정(伽定)이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부활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첫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지도 않을 뿐더러 도대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죽음은 인간을 자유스럽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죽을까 두려워서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으며 해야 할 의무를 회피하는 때가 무수히도 많은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인간을 비굴하게 만들고 탐욕을 저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의에 대해 항의하지 못하는 것도 죽음 때문이며 불정을 행하는 것도 생명을 이렇게 해서라도 좀 더 연장해 보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을 확실히 믿고 생활하는 자에게는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을 것이고 명예나 권세나 금전을 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는 참으로『생명을 잃은 자는 생명을 찾아 얻게 된다』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이해하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 이와는 너무나도 반대의 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정말 부활한 사람의 생활을 해 주길 바라고 싶은 것이다.
둘째로 부활한 자의 생활은 희망을 잃지 않는 생활이다. 부활을 믿기 때문에 아니 부활했기 때문에 절대로 절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불가능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걸핏하면 우리는 우리 사회의 불정은 근절할 수 없고 한국인의 근성은 개선할 수 없다고 불평 불만을 털어 놓는다. 우리는 이러한 불평 불만을 털어 놓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때에 자기 체면을 살린다든지 노력을 아낀다든지 손해 볼까 두려워 한다든지 하는 것은 아직도 죽음의 사슬에서 풀려나지 못한 것을 나타내고 있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부활한 자의 희망의 생활이란 하느님이 모든 것을 다 해주길 기다리는 생활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와 평화와 사랑을 위해 노력할 때 반드시 결과가 따라 온다는 것을 믿고 생활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와 진리와 평화와 사랑이 이루어질까 의심하면서 추구하는 것과 확실히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바라고 추구하는 것과는 그만큼 추진력에 있어 차이가 나는 것이다. 첫째로 부활의 생활은 사람을 실천하는 생활이다. 부활은 생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서 매일 매순간 부활을 맛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부활을 맛보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당신이 이러한 중형을 받아야 할 중죄를 범하셨기 때문도 아니요 죽기를 원하셨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우리 인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요한 15장 13절)라고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것을 직접 실천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이다. 우리도 참으로 사랑을 실천하려면 죽음의 한 형태인 고통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받아들인 이 고통과 희생은 반드시 부활의 참된 기쁨, 아무도 뺏아 갈 수 없는 그러한 기쁨,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 그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참된 기쁨으로 변하지 않는 고통과 부활의 결심을 거두지 못하는 죽음은 참으로 헛된 고통이며 죽음이다. 그러기에 사랑의 실천은 바로 부활로 이끌어주는 생활인 것이다.
끝으로 부활한 자의 생활이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는가를 한 가지 례를 들어 이해해 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이 10층 건물에서 추락 사고로 떨어졌는데 기적적으로 죽지 않고 살아났다.
이 사람의 생활이 그전에 비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10층 건물에서 추락 사고를 일으킬 정도가 아니다. 우리는 도대체 살아 남을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데 참으로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심코 옛생활을 그대로 유지해 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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