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9일 오전 9시.
우리 청학클럽 네 명은 등산 목표를 북한산으로 하고 광화문 비각 앞에 집합하였다. 기온은 0도 내의 날씨는 약간 흐리고 바람이 있었다.
계곡을 타고 스라브 등반 연습, 산장에 도착한 것은 11시30분. 점심을 지어 먹고 다시 등반하여 오후 1시30분에 노적봉 최하단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바람은 점점 세어지고 군데군데 얼음이 있어서 다른 코스를 찾아야 했다. 얼음 장비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더인 최용근이 볼트를 찾아 자일을 걸고 암벽을 옆으로 돌고 있을 때 갑자기 악! 하는 소리가 산을 울렸다.
시계추처럼 반원을 그리며 아래로 추락한 리더….
글자 그대로 우리 네 사람은 공동운명체로서 자일에 묶인 채 암벽에 달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이홍과 조은갑은 5m 아래에 김오수는 최용근과 함께 5m 위에 있는 상태다.
오수는 서둘러 용근에게 접근해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아내고 윈드 자켓을 입혔다. 그런데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응시하던 용근이는 횡설수설 이상한 말을 자꾸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왜 내가 여기 와 있지? 지금 몇 월달이야…』
쇼크로 인해 한동안 멍하던 용근이는 차차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일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던가.
은갑이는 줄에 매달려서도 소리쳐 용근을 위로하고 있었다.
『자일이 있어서 다행이야. 아니면 150m 아래로 떨어져 박살인데…』
가파른 암벽이었으나 거리는 별로 멀지 않아 멀리 자동차 소리도 어렴풋이 들리고 하나 둘 반짝이는 전깃불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구원을 청하려고 소리 치기 시작하였다.
『조난…조난…』
그러나 바람 소리만 높아질 뿐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조난…조난… 사람 살려요…절벽에 매달려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치는 중에 아주 멀리서『알았다』하는 회답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6시 반.
다시 좀 더 뚜렷이『구조대를 보내겠다. 안심해라…』하는 고마운 목소리.
그러나 구름이 낮게 깔려 오더니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해는 지고 멀리 가로등이 아롱거린다. 밤 8시에 군인들이 자일을 들고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조난자는 들어라! 군인들이 올라가려 했으나 얼음 때문에 단념하고 후퇴한다. 후방에 헬리콥터 지원을 요청했으니 그때까지 참아라』우리는 실망했다. 하지만 아무도 죽음 앞에 그 커다란 불안 앞에서 그것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우리 셋은 익살을 부리고 킬킬대는 것이었다.
구조대원은 백방으로 코스를 찾는 모양이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계속 모닥불을 피우고 있다. 불빛! 따뜻한 아랫목-한 발 내딛으면 바로 거기에 있을 듯 가깝게 보이는 모닥불!
은갑은 자꾸 눈을 감는다.
『모닥불이 겁나…뛰어내리고 싶어…』이 여자가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있을까? 말은 없지만 부상 당한 용근이는 추위에 몹시 떨고 있었다. 용근이뿐 아니다. 우리는 차차 졸음에 빠져드는 듯했다. 그러나 자면 큰일이다. 무엇이든지 해서 잠을 쫓고 시시각각으로 매달려오는 죽음에의 불안을 잊어야 한다.
5m 아래서 홍이가 술내기 콩쿨대회를 하자고 소리친다.『그럼 이제부터 이홍군과 주은갑양의 혼성 듀엣의 눈이 큰 아이-』노래가 끝나자 우리는 입으로 박수를 친다. 손으로는 자일을 붙잡고 있어야 하니까.
짝짝짝 열렬한 박수 하하하 호호…이번에는 윗층에서 한 곡조 꽝! 『진정 난 몰랐네』산 아래서도 진짜 사나이란 군가를 불러 우리들의 힘을 북돋는다. 우리도 따라 불렀다. 어울려 부르는 군가는 바람 소리를 몰아내고 가슴 속의 공포와 불안을 잠시 거둬갔다.
한참 뒤에 헬리콥터가 왔다가 다시 돌아갔다. 우리는 장기전으로 버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일기예보를 듣기 위해 가져온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있으려니까 구조대를 따라온 기자가 암벽 밑에서 소리를 지른다. 전화번호와 이름을 대면 집에 연락을 해 주겠단다. 소리 지르기도 이젠 지쳤다. 암벽에 달린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도 이젠 귀찮기만 하고 졸음이 무겁게 몰려온다.
진눈깨비는 심해져서 멀리 가로등도 모닥불도 가물가물해진다.『오 하느님 날이 개이게 해 주십시오. 몇 시간만 참아 주십시여. 하룻밤만 넘기게 해 주세오. 』
우리들은 모든 등산 지식을 총동원해서 졸음과 추위와 피곤을 몰아내야 한다. 그러나 졸음이 온다…. 이것이 인간이 참을 수 있는 인내는 한계점인가? 구조대는 어디를 헤메고 있을까? 두 시가 되자 국내 방송도 뚝 그쳤다. 이때 부상 당한 용근이는 의식을 붙들기에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수가 울먹이며 용근를 흔들어대는 소리….
『안 돼…안 돼…모든 게 귀찮아, 아, 자고 싶다, 죽어도 좋아, 실컷 자고 싶어.』
그러자 모두들 기운이 풀려 지난 날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자일을 끊고 뛰어내려 버릴까. 공부를 좀 더 철저히 할 걸…아버지 어머니께 효도를 해 두는 건데…드디어 새벽 5시30분 구조대의 소리를 듣는다.
『조난자는 움직이지 말라. 코스를 찾았다.』
침착하게 붙어서 암벽을 올라오는 늠름한 모습에 감동하며 우리는 아직 햇병아리구나 하고 생각한다.
6시30분에 구조대는 도착했으나 그들의 제1성은 냉혹했다. 지금 상태로는 내려갈 수 없으니 차라리 정상으로 올라가라는 것이었다. 정상까지 약 3백m…암벽이 아닌 코스로 하산해야 한다. 구조대원과 우리 일행은 부상자와 은갑이를 선두로 다시 등반을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자일을 잡은 손에 힘이 솟는다. 정상에 오르니 기자들과 다른 구조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살아났다.
산 아래서 기운을 내라고 소리 치시는 부모님들…커피에 라면을 전하는 고마운 구조대원들…떠들썩한 기자들의 취재하는 소리…우리는 살아났다!
명실공히 우리는 생사고락을 같이 하여 한 날 한 시에 다시 태어난 동갑내기인 것이다. 우리는 소중한 체험을 얻었다. 그동안 얼마나 자잘한 일에 일희일비하고 화내고 시기하며 다투었던가….
우리는 자연의 거대한 분노를 통해 조금식 철이 들고 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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