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인도교는 어느새 많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헐레벌떡거리며 차들이 일렬로 향하고 있는 같은 방향으로 뛰어가는 그들은 그 숫자나 양태로 보아 마치 피난민의 행렬을 연상케 한다.
각기 한 보따리씩 짐을 들고 쫓기듯 뛰어가는 모습、그리고 그들이 서로 밀치고 제껴지는 모습은 영낙없는 난민인 것이다.
이럴 때 적이 쏘아댄 포탄으로 한강 다리가 두 동강이 나고 많은 사람과 차량이 강물 속에 무참히 쳐박혔다고 했다. 형화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본다.
치르륵 치르륵 철썩、조그만 판도를 그리며 흐르는 강물은 한 치 밑도 안 보일 만치 혼탁하게 오염되어 있다.
그러나 어두운 그 밑에는 벌써 이십칠 년 전에 가라앉은 사람들의 시신과 부서진 차 바퀴들이 그리고 짐보따리며 이불짐들이 가득 쌓여 있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어 앞으로 앞으로…)
국민학교를 다닐 무렵 깡충치마를 입고 고물줄 넘기를 하던 노랫가락이다.
-우리는 벌써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전우의 시체를 무심코 건너다니고 있는 것인가.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군. 어제까지만 해도 한강물 위에 흰 요트를 띄워 낭만적인 풍경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오늘은 어찌해서 아침부터 무거움이 스며드는 것일까.
형화는 다시 한 번 강바닥을 투시해보려는 듯 눈길을 내렸다. 서로 엉켜붙은 많은 사람들이 낯도 모르는 사이면서 한 자리에 누워 있으리라는 추측은 약간의 충격을 자아낸다.
거긴 전혀 생소한 젊은 남녀들도 섞여 있을 터인데 어찌 그 긴 세월을 엉켜붙어 누웠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마도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것이 저지르는 모순일 것이다.
아아、만약 지금 이 시간에 한강 다리가 부서진다면 인도를 메운 저 많은 사람들과 차 안에 가득 찬 사람들 모두가 한데 엉켜서 이 강물 속에 누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형화 또한 실제로 저 낯 모르는 남자들과 살을 맞대고 천연덕스럽게 누워질 것이리라.
-그건 상상도 못할 일이야.
하지만 형화는 이 점에 있어서 숨길 수 없는 짙은 호기심과 흥미를 느낀다.
맑은 아침 하늘엔 구름 몇 조각만이 떠 있는데、그 하늘에서 지금이라도 포탄이 날아와 다리가 부서지고 모두 같은 운명 속에서 강물에 떨어진다면….
형화는 곁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리고는 무언가 소꿉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헛웃음을 짓는다.
-차장、이거 도대체 어찌 된 거야?
-운전수 양반、이 차 가는 겁니까、안 가는 겁니까. 무슨 대책이라도 세워야 할 것 아니오.
형화는 어떤 목청 높은 사나이의 고함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이번 교통 마비는 예삿날과는 좀 다른 모양이다. 저 멀리서 푸른 경찰복을 입은 사람이 버스에 가까이 다가가 무어라고 말을 하자 잠시 후 그 버스에서는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것이다.
-뭐야、뭐야?
사람들은 또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앞차에 운전사가 뛰어왔다.
-출근길이 바쁘신 분은 내리셔서 걸어가시는 편이 나을 것 같답니다. 사고가 크게 난 모양입니다.
말을 전해들은 운전사가 승객에게 소리치자 사람들은 서둘러 차에게 내리게 되었다.
형화는 내닐까 말까 하고 궁리하던 차에 사람들에 휩쓸려 한강 인도로 나왔다.
한강 다리는 가끔씩 흔들하는 느낌이 든다.
달리는 사람들에 부딪치면서 형화는 다리의 난간 손잡이를 잡고 잠시 강물을 내려다본다.
강물엔 더러운 무지개 모양의 기름이 얼룩져 있기도 하고, 보일 듯 말 듯 조그만 판자 조각 따위가 흘러 내려가고 있다.
오물 탓일까, 때때로 탁한 거품이 뭉쳐져서 추하게 둥둥 떠내려간다.
그런데 별안간 형화의 시야에 유난히 부각되는 물체가 떠내려온다.
그건 아직도 채 물에 젖어들지 않은 하얀 종이다.
마치 잔치상에 깔아놓는 듯한 큼직한 종이 한 장이 여기저기 찢어져서 떠내려간다.
아침부터 잔치가 있을 리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강 위에 학교가 있어 게시판을 메꾸다 흘릴 리도 없는 일이다.
-저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종이지? 형화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사방을 휘둘러보았으나 조용한 아파트촌 아래서 부지런히 모래를 실어나르는 몇 대의 트럭과 멀리서 조정 훈련을 하는 한 무리의 조정 대원이 돈벌레처럼 노를 젓고 있을 뿐이다.
좀 더 고개를 젖혔을 때 형화는 나룻배 한 척을 발견한다.
-어、그런데 아침부터 왠 뱃놀이?…나룻배에는 사공 한 사람이 천천히 노를 젓고 한복 차림의 두 여자가 크게 팔을 벌렸다 오므렸다 한다.
자세히는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 같다.
-미친 여자들인가? 아침부터 배를 타고 왠 춤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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