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경 안드레아는 충청도 정산에서 태어났고 부모가 교우였으므로 어려서부터 열심히 믿었다. 본성이 순진했을 뿐더러 너무나 고지식해서 두 번이나 유다스의 간악한 말에 넘어가 교회에 큰 불행을 초래한 일이 있다. 가산은 부요했으나 수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친구와 외인 친지들로 인하여 수제하는 데 많은 지장이 있어서 마침내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이 해 여러 곳으로 이사 다니다가 수원 양간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회장일을 맡아보며 판공 때가 되면 자기 집을 공소집으로 제공하였다. 한편 서울을 자주 왕래하며 교회일을 힘 자라는 데까지 도왔다.
기해년 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매일 같이 교우집을 방문하고『모두가 주 명입니다. 잡히면 위주 치명하십시오. 이같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이러한 기회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이렇게 순교를 격려하는 데 진력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범 주교가 시골로 내려와 잠시 피신하려 하므로 안드레아는 자기집 근처에 안전한 피신처를 마련하였다. 주교는 이곳에 내려와 아무도 모르게 피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유다스 김여상이 교우 수 명을 앞세우고 또 포졸을 거느리고 안드레아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속아 넘어가지 않았으나 결국 하는 수 없이 혼자 가서 주교의 피신처를 알아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여상이가『나만 따라가겠다』고 하였으나 안드레아는『죽어도 못 가겠다』고 거절하였다.『그러면 함께 가다가 도중에서 떨어지겠다』고 하며 온갖 방법으로 안드레아를 유임하였다.
안드레아는 스스로 생각하기를『같이 가다가 만일 여상이 멈추지 않으면 나도 안 가면 되지』이렇게 마음을 먹고 함께 떠났다.
과연 여상이는 도중에서 멈추었다. 안드레아는 혼자서 주교의 은신처로 가서 찾아온 까닭을 얘기했더니 주교는『너는 마귀에게 속았다』고 말하고 나서 즉시 행장을 차리고 여상과 포졸 앞에 자수하였다. 같이 따라오려는 안드레아에게 주교는 따라오는 것을 엄히 금하고 집에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포졸들도 그를 잡지 않고 돌아가게 하였다. 그는 집에 돌아와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말할 수 없는 비통 속에서 밤새 통곡하였다. 그 후 포졸들이 또 내려와 길에서 안드레아를 만나 체포하였다. 관가에 이르러 안드레아는 또 한 번 속아 마침내 종교 자유가 온 줄로 믿고 교우 수령을 고발하였다. 포졸들은 그를 다시 놓아주어 신부를 찾게 하였다.
안드레아는 신부에게 가서 성사를 받고 자기의 처지를 말하고 나서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장이 잡아 올려 주뢰를 틀고 곤장으로 쳤다. 이러한 혹형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교하라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았으며 위주 치명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 후 치도곤 1백 대를 더 맞았다.
옥에 갇힌 지 5개월 만에 목이 졸려 그의 순교를 완성하니 때는 12월 19일(1840년 1월 23일)이었고 나이는 33세였다.
민스테파노는 일명 극가로 불리었다고 하는데 원래 양반집 자손이었다. 본성이 온순하였고 동시에 강직하였다. 모친은 외인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스테파노는 중년에 이르러 부친과 동생들과 한가지로 성교 이야기를 듣고 온 집안이 개종하게 되었고 이래 모두가 열심히 수계하였다.
나이 스무 살이 좀 넘었을 때 상처하였다. 교우들이 재혼하라고 권해마지 않았지만 그는 혼자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여러 해를 지냈다.
그 후 수원 갓등이에서 유혹에 떨어져 한 과부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늘 슬퍼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6ㆍ7년 후에 모녀가 다 죽었다. 이때부터 스테파노는 정처 없이 부평 인천 수원 지방을 전전하며 책을 베끼는 것으로 생계를 도모하였다.
그는 교리에 관한 지식이 깊어서 가는 곳마다 외인을 권고하였고 많은 이를 회두시킬 수 있었다. 유 신부로부터 회장에 임명되었다. 범 주교는 수원 양간에 전답을 사서 스테파노로 하여급 경작케 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배신자 오치서 등이 서울의 포졸들과 함께 교회에 속하는 이 전답을 뺏으려고 공모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스테파노를 만방으로 수색하였다. 결국 서울서 머지 않은 어느 교우집에서 12월 11일에 붙잡혔다.
포장이『이제라도 단념하면 놓아주겠다』고 달랬다.그러나 그는『만만코 못하겠읍니다』고 거절하였다.
다음 주뢰와 주장으로 위협하며 또 배교를 강요하니 스테파노는『만일 나를 석방하면 나 자신만 믿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개종하도록 권할 것입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에 포장이 치도곤으로 치게 하여 칠 때마다『죽일 놈이니 죽도록 쳐라』고 하였다. 이렇게 40도를 맞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으므로 옥에 가두었다.
때는 박해가 끝날 무렵이어서 옥에는 배교하고 석방을 기다리는 교우들이 아직 있었다. 이들에게 스테파노는『배교를 철회하고 같이 죽읍시다. 얼마나 더 살 것입니까』라고 권면하며 그 중 여러 교우를 회두시켰다. 이튿날 또 30도를 맞았다. 한결 같으므로 결국 목을 졸라 그의 순교를 완성시키니 때는 12월 26일(1840년 1월 30일) 나이는 53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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