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오데르강 상류지역의 슈레지엔 마을에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면서 날이 샜다.
새벽이 밝았음에도 마을주민들은 모두들 지하실에 갇혀 웅크리고 있었다.
지하실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를 막론하고 그날그날 점령군이 내리는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소련점령군에 의해 무차별 사살 됐다.
금새 마을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다 바닥이 나버렸고 아이들을 포함한 주민들은 지하실에서 굶고 있었다. 한 지하실에서 두 살 박이 젖먹이인 요셉이 배가고파 계속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애처로운 손자의 울부짖음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크라프쉭 할머니는 죽음을 무릅쓰고 부엌으로 몰래 들어가 귀리부스러기로 죽을 쑤기 시작했다.
바깥에서는 쉴 새 없이 군 차량들이 오가고 있었고 때때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총성과 함께 들리고 있었다.
점령군이 얼마나 무자비했던가는 당시 슈레지엔에 있었던 빵집 딸이 훗날 기술한 다음의 편지에서 잘 나타나 있었다.
-우리의 길거리는「피의 거리」로 불리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안에서 마구 총살당했다-.
그런 상황이었던 만큼 크라프쉭 할머니는 공포에 질려 심장의 고동이 목에까지 맥박 치는 것 같았지만 어린애가 배가고파 먹을 것을 달라고 울고 있는 한 어쩔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고 어깨가 떡 벌어진 험상궂은 소련 병사가 총을 겨눈 채 들어왔다.
그는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침실겸용의 식당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그 병사는 활짝 열린 문으로 한 개의 그림을 봤다. 벽에 걸린 그림은「블랙 마돈나」상이었다.
그는 몽고인 얼굴빛을 닮은 낯선 성모상을 보고 놀랐다. 더구나 부드러운 미소가 잔잔하게 그리고 천천히 표정 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그의 두 눈은 점점 커졌고 당황해서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총을 어깨에 다시 메고 단 한마디의 말도 못하고 집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죽은 다 끓었다. 할머니는 부랴부랴 죽을 어린애에게 갖다 주고는 곧장 구석에 꿇어앉아 묵주기도를 올렸다.
그 검은 성모상은 그녀가 소련군이 침입하기직전에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원래는 팽개쳐져 액자틀도 없었던 것인데 새로 틀을 끼워 벽에다 걸어두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수시로 손으로 보석을 다루듯이 매만지고 닦아 깨끗하게 보관해온 것이었다.
할머니는 그 소련군이 성모상을 보는 순간 무언지 모를 감동과 공포를 느끼고 물러가게 한 성모님의 그 보이지 않는 사랑의 힘에 감사하며 끝없이 기도했다.
『…이제와 우리 죽을 때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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