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남해군 평현리 야촌부락.
이곳이 내가 태어났고 지금도 살고 있는 마을이다. 남해 동학군 지휘자셨던 조부님이 왜군에 패한 이후 시골에 숨어 살면서 부친은 9살 때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야만 되었다.
그래도 뼈 빠지게 일한 덕분으로 그럭저럭 가정을 이루게 된 우리 집안에 나의 누이는 8년간이나 병원을 드나들다가 불구의 몸으로 시집을 갔다.
가산은 완전히 기울었다.
그 가난한 살림에도 부친은 늘 타이르시기를『사람은 정직하고 부지런해야 한데이. 내처럼 이래 살지 말고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해야 한데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말씀이었으나 자식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으므로 나는 평소 가슴 깊이 새겨 두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나는 가난 속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곧 결혼을 했고 군복무를 마치면서 집안 생계를 도맡기 시작하였다. 군대 있을 때 얻은 농사 지식으로 땅을 개간하여 뽕나무와 치자나무를 심은 것이다. 식구들은 고구마와 콩으로 끼니를 이어가며 꿋꿋이 일을 하였고 5년의 개간사업이 끝나는 60년 봄부터는 9백여 그루의 뽕나무에서 10여만 원 그리고 약재가 되는 치자나무에서 오만 원의 수입이 나왔다.
그러나 나는 만족할 수가 없어서 공무원 시험 공부를 시작하였다.
군대 있을 때 본 도시와 농촌 출신의 우애 있는 형제를 본받으려는 속셈이었다.
서울 식구들은 농번기에 농촌으로 현금을 보내고 추수기가 되면 시골에서 쌀과 김장거리를 보내주며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나는 1인 2역을 하기로 하였다. 1963년. 마침내 나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다. 부모님은 기뻐하시며『아베야. 니가 공무원이 된다고 머심의 자식으로 태어나 벼슬을 다 하다이. 니는 과연 효자대이』
그러나 나는 이른바 벼슬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었다. 공직생활을 하며 받은 봉급이 농촌에서는 귀한 현금이 된다는 것에 더욱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첫 월급 날이 다가오자 나는 곧바로 은행에 예금하려다 아내에게 그 귀한 봉급 봉투를 쥐어주고 싶어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월급 안 탔다고 생각하고 저축합시다. 응! 』
『알아요.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 심정 내 안다 고마』
처음으로 타온 월급…남편과 아이들에게 고기 반찬도 해주고 싶고 어른들께 내복 한 벌이라도 사드리고 싶겠지…
나도 돌아오는 길에 아내의 크림 곽이라도 하나 사올까말 까 얼마나 망설였던가.
하지만 나는 내일을 위해 참았다.
아끼고 저축하면 쉬지 않고 늘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나의 재산은 아이들의 고등학교 학비까지 저축했고 논 천오백평과 밭 3백평이라는 비교적 아쉽지 않은 농토를 장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내 개인 내 가족만을 생각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깐 1961년 그동안 내가 해온 황무지 개척과 농토 개량 그리고 저축이 꾸준히 되풀이 된다면 우리 이웃인 이촌부락 전체가 넉넉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신용협동조합을 운영하기로 하였다. 우선 청년회와 부녀회를 조직하여 근로정신을 고취시키고 내 스스로 술을 끊어 솔선수범을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가난한 마을에서 묵고 살기도 힘든데 저축을 해? 』
뒤따르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반발뿐이었다.『오원 십원 모아가 뭣에 힘을 쓰겠는강? 미친 수작 작작 하거래이』
『저축했다고 해도 그렇게 후일에 가 인푸레락하는 게 있어서 돈 가치가 안 떨어지것나. 뼈 빠지게 저축한 돈 검불이나 마찬가질세!』
『니가 뭐꼬 어잉 니 우리 며늘아기한테 뭐라 했나 절미운동이라 절미통 만들어가 저축하라꼬 차 버리라. 니 착한 우리 며늘아기 시어미 모르게 쌀 퍼가는 버릇 가르치기가 어이』
그러나 2년여의 끈질긴 설득 끝에야 촌부락 신용협동조합은 27명의 청년회원으로 창설되었다. 나는 계속해서 남해 일대의 각 마을에 신용조합을 설립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남해에 11개의 조합을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마을은 차차 변화되었다.
편리한 가족과 넓은 안길이 생기고 농토는 확장되었으며 순환도로가 뚫리기도 하였다.
부락민 모두가 이 일에 적극 협력하기 시작했고 저축금은 교육비 농자금 등으로 융자되었다.
이제 부락은 조직적인 저축으로 변화되어 간다. 저축이야말로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가난을 극복하는 길임을 깨닫고 절미 저축과 푼돈 모으기 폐품 수집의 기풍이 마을에 가득한 한 우리 농촌은 더욱 풍요해지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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