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권위가 주어져 있지 않은 전교사라는 직은 제복없는 용사와 같아서 신자들의 신망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용단 그리고 피나는 숨은 노력이 필요하다. 일거수일투족 말한마디 복장 하나에도 상대편 반응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역마다 다른 향토색과 인심에 빨리 적응해야 하고 외부의 중론과 신자들의 분위기 조성에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특히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높임을 받고자 함에서가 아니라 가르치는 자의 권위 때문에 절대로 얕보임을 받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뿔 없는 염소의 고독이 있는 것이다. 전교사란 직책이 나에게는 힘겨울 때가 많다. 그러나 예레미아의 소명(召命)을 지고 넘어서고 일어서고 기도하고 달린다.
8년 전-강변에 자리잡은 어느 공소에 2년 반 동안 있었다. 신임지에 가기 전날 신부님께서 점심을 대접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시게 될 공소는 교우들의 협조는 좋지만 그 중 한 집이 신임 전교사가 갈 때마다 말썽이 되어 벌써 몇 분의 전교사가 밀려 갔습니다. 이 점 유의하십시요』
임지에 와서 보니 담도 없는 사택은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었고 모래 실은 강바람만 휘몰아쳤다. 깨진 유리창으로 방을 들여다보니 방 안 이 구석 저 구석에 동네 개구장이들이 깔겨버린 대소변이 쌓여 있었다.
우선 집 정리를 하고 짐을 풀었다.
며칠 후 소식을 듣고 찾아온 10여명의 교우들과 대면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가 끝나자『회장님 술 하실 줄 아십니까?』하고 묻는 청년이 있었다. 하고 많은 초면 대화 중에 술을 할 줄 아냐는 물음을 받고 웃고 있는 그를 쳐다보니 호의의 대접보다는 상대의 무게를 달아보고 싶어하는 야릇한 호기심이 더 많아 보였다.
『바로 그 집안 쳥년이구나』직감하면서 『한 말쯤은』하고 조용히 웃으며 응수했더니『정말입니까?』『사 주셔 봐야지요』잠시 후에 밖으로 나간 그가 한 되짜리 소주병을 들고 들어왔다.
술잔이 돌자 아니나 다를까 그의 술잔 세례가 시작된다. 연거푸 연거푸 마시고는 곧 내게 잔이 온다.「급히 마시면 지구력이 없는 법」이란 술의 생리 반응을 아는 터라 내게 집중되는 잔을 피하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것 저것 묻고는 서서히 마신 잔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때마다 빨리 마시고 자기에게 달라고 채근댄다. 그러나 못 들은 척 시간을 끌었다. 시간이 흐르자 한두 잔 마신 다른 분들은 그 이상의 잔을 사양했고 아직 술은 8홉은 됨 직하다.
벌써 주기가 도는데 상대는 그와 나 단 둘뿐이다. 이 자리에서 물러서면 그는 내심 나를 가벼운 사람으로 여겨 내 말의 성실성과 참뜻까지도 믿지 않을 것이다. 유치한 일이지만 이런 작은 일까지도 우리는 주의하며 산다. 작은 불신이 커지고 그것이 유기반응을 일으킬 때는 교회 안의 발언이 그 무게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용단을 내려 숙명의 결전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마시고 주고 다시 받고 또 주었다.
상대의 생리 반응을 살피며 느리게 혹은 빨리. 드디어 반 홉 가량의 술이 남게 되자 혀가 잘 돌지 않는 말로 그는『회장님 참 술이 세십니다. 이젠 앞으로 회장님과 마음 딱 터 놓고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하며 나머지 잔을 내게 권해 왔다.
마지막 남은 술을 병채로 마신 후 나는 그의 손을 우악스럽게 움켜잡고 눈을 똑바로 세워 그를 응시하고는 똑똑히 말했다.『앞으로 내 일에 협력하여 주오. 시시하고 부당한 주장으로 사목에 지장을 준다면 그때는 술이 아닌 이 주먹으로 해결할 거요』하고는 비장한 마음으로 주먹을 불끈쥐어 그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한동안 나를 주시하던 그가『좋습니다!』하면서 내 두 손을 힘 주어 잡는다.
술과 주먹! 절제와 온유를 수덕해야 하는 우리에게 아이러니하게도 술과 주먹이 하나의 수단이기도 했다. 제복 없는 용사의 만용일까? (계속)
▲일선 전교사들의 많은 투고를 바랍니다. (편집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