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이고 빵을 나누고 기쁘고 순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사도 2장 44절~47절)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생활을 늦게나마 깨닫고 그들을 따르고 있다는 신념은 나에게 항상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어느해 12월 3일 프란치스꼬 성인의 축일이었다. 그때 내가 부임해 있던 본당은 처음으로 60여 평짜리의 유치원을 갖게 되었다. 건축비의 거의전액을 교구장께서 도와주셨고 나머지를 본당에서 부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독히도 가난했던 신자들이었기에 나머지의 비용은 부채가 되었고 그 부채는 해를 넘기게 되었다. 가난뿐만이 아닌 성의 부족으로 빚어진 이 부채는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을 계기로 몽땅 갚을 수 있었던 것이다. 빚을 갚기 위한 작전은 본당 부녀회의 화장품 장사로 시작되었다. 어느 본당에서나 여교구들의 활동이 8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 가톨릭 교회 실정에 따라 본당 부녀회의 화장품 판매 활동은 대단했다. 살을 에이는 눈보라 속에서도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소낙비 속에서도 빚을 갚겠다는 이들의 결심은 깨어지지 않았다.
남편들의 눈을 피해 (여편네가 극성이라고 야단맞으니까) 올망졸망한 보따리들을 싸 들고 이 마을 저 마을로 행상 다니던 이들의 모습은 아직도 내 마음에 사진처럼 박혀 가끔 숙연한 마음을 갖게 한다. 어쨌든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행상(?)인 이들에게 본당 신자들은 물론 타본당 신자와 외교인까지도 감동、적극적인 협조로 한 덕분에 새 집을 갖고도 기쁜 줄 몰랐던 신자들과 꼼짝없이 빚장이로 해를 넘길 뻔 했던 본당 신부님은 홀가분하고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을 수 있었다.
이 화장품 행상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산 교훈을 남겨주었다. 물론 불평과 비협조적인 언사와 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작은 불평만은 서로 아끼고 보호해주는 형제애의 그늘 속에 감추어져 버리곤 했다.
땀 흘려 일한 후에 얻어진 기쁨과 평화는 바로 우리가 차지할 수 있었던 값진 보물이었다.
내가 전교수녀로서 초년병이었던 그때는 아직 밀가루 등의 구호품이 많이 있었다. 뫼시고 있던 본당 신부님은 이 구호품을 신자는 물론 비신자들에게도 나누어 주셨는데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절대 거저 나누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능력이 없어서 가난하기도 하지만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경우가 더 많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이분은 꼭 일을 한 대가로 구호 물품을 주셨다. 본당 일이든 지역사회 봉사든 열심히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항상 정당한 몫의 물품이 돌아가곤 했다. 처음엔 좀 야박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나와 일부 신자들은 노력한 대가를 떳떳이 받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러한 생각을 가졌던 것조차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검은 색 수도복을 입고 하얀 밀가루를 나누어주다 보면 어느새 하얀 수도복을 입고 있는 내 모양은 지금 생각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오곤 한다.
짊어진 빚을 갚아야 함은 물론 그 이상 베풀어야 할 책임을 인식시켜 주었고 땀 흘려 노력해서 받는 대가의 정당함을 깨우쳐주었던 그때의 전교생활은 남은 내 수도생활의 확실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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