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아버지를 계시하시면서 자신을 특히 아버지와 본질이 같은 아들로서 나타내셨는지 생각해봤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교회는 니체아-콘스탄터노플신경의 말로 아들 하느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고 선포합니다.『하느님으로부터 나신 하느님이시요, 빛으로부터 나신 빛 이시요,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이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자체로 알려지고 십자가위에서 흘린 그분의 피로 봉인되고 그분의 부활로 비준되고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증거 되고 신약의 글로 전수된 신앙의 진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요한 8, 58)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있었다.』고 하시지 않고『나는 있다』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항상 계신다는 것이고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서두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1, 1~3) 따라서『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이라는 이 말은 아브라함에게 호소한 이스라엘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과 예수님과의 논쟁과 관련하여『아브라함이 태어나기 훨씬 전』을 뜻하며『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그분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제4복음의 서두말씀으로 밝혀집니다. 즉 하느님 홀로에게 고유한 영원 속에 계심, 아버지와 성신에게 공봉 되는 염원 속에 계심입니다.
사실 아타나시오 신경은 이렇게 말합니다.『이 삼위일체 안에서는 아무도 먼저 계시거나 나중에 계시지 않고 아무도 더 크거나 적지 않고 3위 모두가 그들 가운데 함께 영원하시고 함께 동등하시다.』
불가해한 3위의 신비
2. 요한복음에 의하면 말씀이신 아들은 한 처음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요한 1, 1~2참고). 사도의 가르침에도 같은 개념이 나옵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들을『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다』는 것을 히브리서에서 읽습니다.『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오,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한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입니다』(히브리 1, 2~3). 바오로는 골로사이서 에서『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1, 15)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들은 하느님-말씀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십니다. 이「말씀」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모든 것 이만 들어지고 우주가 창조되었습니다. 창조가 있기 전『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모든 것이』시작되기 전, 말씀은 아버지와 공통으로 영원한 존재와 신적 생명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 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한 분』(히브리1, 3)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원리」로 말씀은 아들입니다. 그분은 영원토록 아버지의 낳음을 받기 때문입니다. 신약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한분이며 3위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계시합니다. 그래서 존재론적으로 절대적인 본질의 일치로 영원히 하느님은 계시고 시작이 없이 말씀을 낳는 아버지며 그분은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낳음을 받는 아들입니다.
3. 이 영원한 아들의 낳음은 교회가 여러 차례 신앙진리로 선포하고 정의했습니다. (니체아와 콘스탄티노플뿐 아니라 다른 공의회, 예를 들면 1215년 제 4차 라떼란 공의회에서도). 하느님의 불가사의한 실재가 항상 너무나 부적절한 인간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는 만큼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그것을 검토하고 설명했습니다. 이 설명은 뜨리덴띠노 공의회의 교리서에 요약돼있는데 대단히 정확하게『하느님의 무한한 풍요로움 때문에 그분은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동등하고 똑같은 아들을 낳으십니다.
동일성은 복수성 배제
하느님안의 이 영원한 낳음은 절대적으로 영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정말 확실합니다. 왜냐하면『하느님은 영이시기』때문 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하나의 표상, 하나의 생각,「개념」을 산출하는데, 다시 말하면「개념 된 생각」을 산출하는데(라틴어의 말
이 낳음에 있어서 하느님은「신들」의 복수성을 배제하는 신성의 최고 동일성으로 낳으시는 분으로서 동시에 아버지이고 낳음을 받는 분으로서 아들입니다.
그「말씀」은 아버지와 같은 본질의 아들이며 그분과 함께 구약과 신약이 계시하는 한 하느님입니다.
불가사의한 신비
우리에게 불가사의한 이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신비에 대한 해설은 전체 크리스찬 전통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낳음이라는 것이 직접 계시에 담겨 있고 교회에 의해 정의된 신앙진리라면 교부들과 교회학자들이 그 신비에 대해 한 설명은 바탕이 잘된, 확실한 신학적 교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거하시는』(Ⅰ띠모테오 6, 16)분를 둘러싸고 있는 어두움을 우리 마음의 눈앞에서 제거시킬 수 있는 척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인간지성이 하느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수준에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신비를 꿰뚫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을 파악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말은 특히 여기에 적용됩니다.
그렇지만 계시는 우리에게 그 신비의 본질적 용어들을 펼쳐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에서의 지복직관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동만 모든 지적 이해를 훨씬 능가하는 방식으로 그 신비를 우리에게 표현해주고 맛들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말씀이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 1, 1)『그 분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요한 1, 14)는 것과『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한 1, 12)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아버지 품안에 계신 외아들』(요한 1, 18)과 이 땅을 떠나시면서 하느님의 양자들로서 그러고 그분의 형제들로서(로마 8, 15-23, 갈리디아 4, 5와 에페소1, 5 참고) 하느님의 영광을 누리도록『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겠다.』(요한 14, 2) 고 약속하신 외아들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