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주(베드루)와 영주(바오로)는 형제지간이다. 원래 명문거족의 후예로 신유년(1801)에 순교한 홍낙민은 그들의 조부이고 한 달 전에 전주에서 순교한 홍자영은 그들의 숙부가 된다.
부친은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내포지방으로 낙향하였고 이래 서산지방 여사을에 정착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이에 대한 견고한 가르침은 부친이 자녀들에게 넘겨준 유일한 유산이었고 한편 자녀들은 이 가정의 전통을 이어받아 열심 수계하였으며 그들의 남달리 뛰어난 덕행은 모든이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이 나라에 들어온 전교신부들은 이 형제를 그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하여 교우들을 돌보고 지도하게 하였다. 이에 형제는 더욱 열심을 분발하여 염경 묵상과 독서를 부지런히 하고 집안 식구와 모든 교우들을 찾아 돌보며 위로하였다.
그들의 열성과 교우들에 대한 회장으로서의 꾸준한 책임 수행은 모든 이의 존경을 얻게 하였고 전교신부들도 그들의 재능과 헌신에 감격하여 여러 번 그들에게 교회의 극히 중요한 일을 부탁하기도 했다.
기해년에 군란이 크게 일어나서 사세가 극히 위험할 때에 형제는 한 선교사에게 피신처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무모한 행위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을 확신한 그들은 순교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음력 8월에 서울 포졸에게 잡혀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유다스 김여상이 기어코 잡아야 할 유력한 교우 명단에 그들의 이름을 올려 놓았던 때문이다.
포장이 형제를 불러 문초하기를『배교하여라. 그리고 책과 동교인을 대라』고 하였다.그러나 베드로와 바오로 형제는 치명자의 후손답게 문초에 따른 잔혹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굳세게 굴복하지 않았다. 곧 형조로 이송되었다.
때의 병조판서는 홍 베드루 형제의 친척이었다고 하는데 한 증인의 말에 의하면 홍상주(?)였다고 한다. 그래서 판서는 자신이 직접 고문을 가하기가 싫어서 보좌관으로 하여금 기어코 배교를 얻어내어 사형에 처하지 않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형제가 얼마나 많고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던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뿐더러 같은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은 그를 배교시킴으로 판서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잔인한 고문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 소용이 없었고 도리어 그것으로 형제의 신앙을 더욱 빛나게 할 뿐이었으니 사실 형조에서는 이 형제의 문초에 대해 이렇게 실망적으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홍병주인즉 낙민이 할아버지가 되고 자영이가 숙부가 되므로 그들에게서 도를 배운 만큼 미혹됨이 더욱 심하다.』
『영주인즉 요서와 요술을 가정의 학문이라고 자칭하고 주재의 초상을 거짓으로 지어냈으며 형별을 감심하고 죽기를 맹세하여 뉘우치지 않는다.』고.
결국 형제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형은 12월 27일 동생은 28일에 각각 당고개에서 참수 치명하니 때에 형의 나이는 42세요 동생의 나이는 39세였다.
베드루는 형장으로 가는 도중에『천주의 모친과 천신과 성인들을 만나러 가는 데 시간이 늦는다』고 하여 수레를 끌고 가는 소 보고 빨리 가기를 재촉하였다고 한다.
『그의 삼촌은 (홍자영) 신유군난에 귀양 갔더니 수십 년을 열심 수계하다가 기해년에 다시 잡혀 전라 감영에서 며느리(풍주의 처 심발바라)와 한가지로 치명하니 신유 기해 두 큰 풍파에 3대의 5인이 치명하니 이는 또한 동국에 드문 일이리라.』기해 일기는 홍베드루와 바오로의 치명일기를 끝 맺었다.
이인덕(마리아)는 한 달 전에 순교한 조발바라의 딸이요 영덕(막달레나)의 동생이다. 천성이 온순하고 조용했으며 순진하고 정직한 성격이었다.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문교한 이래 열심히 믿으려 했으나 외인인 아버지가 무수히 방해하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여행을 떠난 기회를 이용하여 인덕은 언니와 함께 집을 나와 영세를 하고 돌아왔다.
형제가 동정을 지켰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들을 꼭 출가시키려 했으며 이로 인한 언니에 대한 아버지의 공격과 학대는 날로 심해만 갔다. 세 모녀는 견디다 못해 하는 수 없이 집을 뛰쳐 나와 교우집으로 피신하고 말았다. 여기서 세 모녀는 추위와 굶주림 가운데서도 서로 의지하며 기도와 묵상과 독서로 수계를 충실히 하였다.
기해년 음력 5월에 포졸이 와서 세 모녀를 잡아 좌포청에 가두었다. 포장이 올려 문초한 다음 세 모녀에게 각각 주리 한 번씩을 틀었다.
그 밖에도 많은 고문을 당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굴복하지 않았다.
때는 무더운 여름이어서 감방에는 염병이 유행하여 세 모녀가 모두 이 병에 걸렸다. 많은 사람들이 염병으로 죽어 나갔고 그 중에서도 마리아는 언니와 함게 옆에 누워 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이제 형제는 어머니보다 더 긴 시련을 겪어야 했고 동생은 언니보다 한 달이나 더 오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마침 12월 27일 마리아는 당고개에서 다른 6명의 순교자와 함께 당년 22세로 그의 동정과 순교를 동시에 완성함으로써 어머니와 언니의 뒤를 따를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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