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같은 사람은 자기 완성으로부터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까지 이르는 것을 교육의 목적이라 했습니다. 페스탈롯지는 자연적인 인간에서 이성적 인간에까지 도야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시비는 여기서 삼가하겠습니다. 인생을 흔히 하나의 여로(旅路)로 비유합니다. 실제로 그런 것입니다.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고 또 어디고 가는지 몰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한다면 여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여로가 보다 즐겁고 행복한 여정이 되도록 기획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즐거운 여행이 남의 여행을 불쾌하게 하지않는 것은 말할 것 없고 남의 여행의 즐거움을 오히려 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랍니다.
어떤 인간을 교육하느냐 하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겐 개인마다 다른 인성적 특성이 있고 또가 령 그 인성이 동일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교육의 작용에 있어서 시간이나 공간이나 또 기술이나 능력상에 차이가 있어서 그 차이만큼 다른 결과를 가져오고 또 다르게 작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인간적 노력으로서 교육이 교육하는 사람의 의지, 기술과 교육 받는 자의 능력과 의지에 외로부터 가해지는 물리적, 심리적 과정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형성(形成)의 원리와 자각(自覺)의 원리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수도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구분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육하는 목적은 어떤 기술이나 방법을 합리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때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마에 뿔이 있어서 뿔을 뽑는 일을 교육이라고 합니까? 엉덩이에 꼬리가 달려 꼬리를 떼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 말은 적어도 그 안에 이상적(理想的)인 경지의 인간을 가장 자연적인 인간만 가지고는 아무래도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이상적(理想的)인 경지를 이성(理想)이라고도 하고 도덕(道德)이라고도 하여 이성인(理性人) 또는 도덕적 인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말했다고 이상적인 경지가 다 표현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교육이란 활동은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한 것입니다. 교육이란 활동이 일어나는 조건은 적어도 교육 받는 대상으로서 아동 또는 피교육자가 있어야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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