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 김성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피고인의 범죄 행위는 엄벌해야 마땅하지만 피고인이 소질 있는 권투 선수라는 것을 감안하여 앞으로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위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나는 이번에 뜻 밖에도 법의 온정으로 자유의 몸이 된 김성준이란 사람이다.
이제 여러분 앞에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숨김 없이 털어 놓음으로써 앞으로 동양 챔피언과 세계 챔피언을 지향하는 나의 훈련에 채찍이 되고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생각하면 나의 어린 시절은 얼마나 불우했던가. 무거운 한숨이 집안 구석구석에까지 박힌 어두운 가정이었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 국민학교를 겨우 나와 진학도 못한 채 빈들거리는 우리 형제들…그날 따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은 대단했다.
나는 속치마 바람으로 뛰쳐나간 어머니에게 치마를 갖다 주고는 다시는 식구들을 보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하루 종일 길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남대문시장을 지나 서울역 구내에 들어서니 나보다 두어 살 더 먹은 거지들이 쑥덕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도망나온 고아들로서 보호소 직원과 경찰을 피해 부산으로 가려는 참이었다. 차삯이 없어서 못 간다는 내 말에 웃기지 말라며 내 팔을 끌어간 곳은 객차의 의자 밑이었다. 우리들은 승객들이 내던지는 쓰레기 더미 속에 엎드려 부산으로 왔으나 소년들은 곧 잡혔고 커다란 차에 실려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외톨이가 된 나는 다시 서울행 열차 안에서 내 나이 또래의 친구를 사귀었다. 그는 남대문시장에서 먹을 것을 훔쳐내서 자기도 먹고 내게도 나눠 주었다. 그러나 그 일도 한때여서 나는 마침내 아동보호소에 수용되었다.
일 년이 지나자 기술이 있다는 한 소년과 그곳을 탈출했다. 나는 그 소년으로부터 약간의 소매치기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잡히고 도망하는 것을 끼니처럼 거듭하는 그들인지라 소년은 곧 붙잡혀 들어가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소매치기 김동호파 두목인 김동호 조직의 일원이 되어 본격적인 빽따기로 활동했다. 동료가 바람을 잡아주면 주로 시장 나온 가정주부들의 빽을 노린 이른바「기계」로 활약을 한 것이다.
천부적 소질이 있다고 추켜세우는 두목 밑에서 잔뼈가 굵어진 71년 어느날 평소 안면이 있는 ○○지배인이 권투를 해 보도록 권유하는 것이었다.
만리동 동양권투회관의 관장님을 소개 받은 나는 처음 그로브라는 것을 끼고 기초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일주일 후 나는 2년 경력의 선배와의 연습 시합에서 KO승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입관한 지 5개월 만에 데뷰전을 가지게 되었다. 환한 불빛 아래 팬츠 하나만 입은 채 온 몸을 들어내고 여러 사람이 주시하는 가운데 서 있으려니 좀 어리둥절했지만 공이 올리자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그 상대와는 무승부였다. 출발은 그다지 좋은 편이 못 되었으나 6라운드 게임에서 2회 2분25초 만의 통쾌한 KO승이었다. 그리하여 6회 8회를 뛰는 국내 랭킹 복서가 되면서부터 나의 성적은 차츰 괄목할 만큼 좋아졌다.
『너에겐 소질이 있다. 후드웍은 빠른 편이 못 되지만 펀치가 좋고 보디웍은 유연해…계속 전진해라. 너는 다능하다. 좌우 훅도 좋고 아파컷도 칠 줄안다. 카바가 좋고 잽도 상대방에게 충격을 주고 있어 알겠지… 밤에만 나와서 슬슬 연습만 하지 말고 우리 체육관에서 먹고 자면서 본격적으로 정진하도록…』
그러나 나는 아직 소매치기 조직의 일원이었다. 여전히 빽따기 기계 노릇은 계속되었으며 체육관에는 밤에나 드나드는 형편이었다.
이 무렵 나는 홍제동 집에 몰래 들리곤 하였다. 부모님도 형도 만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여중에 다니는 막내 누이동생만이 못 견디게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궁금해하는 동생에게 낮에는 공장에 다니고 밤에는 권투 연습을 한다고 말하면서 돈을 쥐어 주었다.
『알았어, 오빠의 정성이 담긴 돈이니까 고맙게 받겠어. 공장에 나가 힘들게 번 이 돈으로 학용품 사서 공부 열심히 할게』
누이 동생의 말은 나의 양심을 아프게 찔렀다. 그러나 돈 쓰는 재미를 안 나는 좀체로 검은 손을 씻을 수 없었고 조직에서도 호락호락 빠져 나오게 놓아 두지는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나의 권투는 급속도로 발전하여 마침내 대망의 십회전 경기 라이벌 리틀 박과의 제1차전을 맞게 되었다. 초반에는 신중히 카바를 잘하고 적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말을 코웃음 치며 나는 힘으로 밀어도 문제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시합에서 나는 근소한 차이로 판정패를 받았다.
나는 울었고 깨닫게 되었다.
『힘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흥분은 금물이다』
곧 다시 시합이었다.
3회 케오승! 통쾌한 승리였다.
나는 격려해준 누이 동생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은 보잘 것 없는 적은 돈뿐이었다.
나는 남대문 시장으로 나섰다. 지하도에서 빽따기를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내가 훔친 돈은 가난한 부인과 가엾은 딸의 전 재산 오만 원이었다.
나는 능청스럽게 다가갔다.
『여기 이게 떨어져 있는데… 혹시 이것 때문에 우시는 것 아녜요?』
어쩔 줄 모르고 울고 있던 부인이 소리쳤다.
『에그머니 내 돈! 맞었어 내 돈이야! 원 이렇게 고마울 때가…』
그 후 지난 9월 한국 주니어 푸라이급 타이틀전에서 케오와 진배 없는 압도적 스코어로 타이틀을 탈취하고 동양 2위, 세계 9위에 랭크되었다.
그러나 드디어 그날이 왔다…
숙적 리틀 박과의 방어전을 무사히 끝내고 집에 들어왔을 때 느닷없이 형사들이 들이닥치는 것이 아닌가. 서대문 구치소의 66일간… 나는 감방안에서도 의욕을 버리지 않고 연습을 계속하였다.
동료 수인들은 한 술의 밥이라도 더 내게 주면서 격려를 했고 절도죄로 6년형을 받은 수인 한 분은 친동생처럼 나를 아껴주는 것이었다.
이제 그분들의 보이지 않는 후원과 가족들의 격려 속에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출감하고 보니 검사님과 판사님 그리고 매니저 프로모터 여러분들의 기대가 크고 나의 죄를 논하기 전에 장래를 걱정해 주시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또 있겠는가… 기필코 동양 타이틀과 세계 타이틀을 쟁취할 때까지 한시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