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아오스딩이고 일명「이선」이라고도 불리던 박종원은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겸손하고 온순하며 친절한 성품에다 뛰어난 재주와 학식 때문에 모두의 칭찬의 대상이 되었다.
이미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아주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한때 그는 약방의 거간 노릇을 해가며 밥벌이를 했다고 한다.
가난으로 인한 의식이 박한 자기의 신세를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참아 받으며 한편으로는 어머니에게 극진히 효도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와 한 가지로 수계하며 교우로서의 모든 본분에 충실하였다.
자라서 박아오스딩은 역시 서울 출신이고 또한 순교자의 자손인 고발바라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세 남매를 두어 다 같이 열심히 봉교하였다. 집안 사람을 교훈할 일이 생기면 자애롭게 하였다. 잠을 적게 자고 많은 시간을 깨어 있으면서 신공과 묵상을 부지런히 함으로써 스스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영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의 구령에도 전적으로 헌신하였다. 교리 지식에 깊고 밝아 교우와 외교인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으며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를 찾아 대세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의 결점이나 어떤 큰 과실을 보게 되면 친절한 말로 부드럽게 타일렀다. 남이 죄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괴로워하는 일이 얼굴에 드러났다. 그의 충고는 아주 감동적이어서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고 한다. 매양 좋은 일은 남에게 사양하고 궂은 일은 자기가 앞서서 참으로 그의 다정함은 세간에 알려져 교우들은 웃으며『아오스딩이 골 내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을까』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늘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수난을 생각하며『오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오 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를 위하여 치명함이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늘 치명 준비에 힘썼다.
한국에 전교신부를 영접하려고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박아오스딩도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여행을 하며 이 중대한 일에 힘 자라는 데까지 기여하려 했다.
마침내 중국인 유빠치피고 신부가 입국하였고 아오스딩의 비상한 열심이 미구에 신부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유신부는 그를 내포지방에 파견하여 그곳의 교우들을 가르쳐 그들의 영성과 용기를 북돋우 게하였다.
이어 입국한 범 주교도 아오스딩의 재능과 덕행을 인정하여 그를 서울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아오스딩은 이 중하고 위험스러운 회장의 직책을 성심껏 이행하려고 열성을 배가하였다. 밤은 외교인을 개종시켰고 주일이면 교우 집을 두루 찾아다니며 모든 교우들이 성사를 타당히 받을 수 있도록 끊임 없이 권면하였다. 교우들만이 아니라 외인들까지도 아오스딩의 공적을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곧 그의 이름이 드러나게 돼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오스딩은 비록 피신 중이라 할지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밤이 되면 감옥을 찾아가 잡힌 교유들의 동정을 스스로 살피고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붇돋아 주며 교우들과 서로 상통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 이 무렵의 순교자에 대한 상세하고도 많은 사실이 후세에 길이 알려지게 되었다.
8개월 동안 피신하여 다니던 끝에 결국 9월 20일(10ㆍ26) 포졸에게 붙잡혔고 이틀 밤에는 그의 아내 고발바라도 잡히어 부부가 포청에서 재회하였다. 부부 같이 문초와 고문을 받았고 부부 한가지로 용감하게 이겨냈다.
포청에서의 박아오스딩의 열성은 같이 갇혀 있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그래서 그들은 아오스딩의 얘기 듣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포졸들까지도『오늘 저녁엔 이 선의 도리 얘기를 들으러 가자』고 말했다는 것이다.
포청에서 받은 여섯 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문으로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지만 아오스딩은 마음이 화평하여 안색이 여전하고 열정이 간절하여 의연히 굽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10여일 만에 아내와 한가지로 형조로 이송되기에 이르렀다. 형조에서도 주장이 가해지는 문초를 받음으로 살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 유혈이 낭자했지만 종시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부부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아내가 먼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부인이 순교한 후에도 박아오스딩은 한 달 나머지 더 오랜 시련을 겪어야 했는데 그간 12월 11일과 13일 두 번에 걸쳐 형문을 다시 받았다. 아오스딩은 죽기를 맹세하고 배교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천당지옥이 엄연히 존재하고 제사는 헛된 예식이어서 지낼 필요가 없다고 호교도 하였다.
옥에 있은 지 4개월 12월 27일에 다른 6명의 증거자와 함께 당고개에서 그의 순교를 완수하니 때에 그의 나이 48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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