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전교사 초년생 시절 얘기다. 종적(縱的) 질서가 강요되는 유교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농촌지역 사목에 있어 말(言語) 특히 존대어와 하대어를 대상에 따라 알맞게 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도시사목도 마찬가지라 하겠지만 단 한 살 차이에도 상대적 태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농촌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두 번 만나고 나면『실례지만 회장님 무슨 생(生)이십니까?』하고 묻는 것이 상례이다.
『정축생(丁丑生)입니다』대답하면『안항(雁行)은 몇이나 되는지, 관향(貫鄕)은 어디로 쓰는지, 양친은 계시는지, 선친(先親)은 무엇을 하셨는지』계속 꼬치꼬치 물어온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기 위한 병법(兵法)의 정신일까.
진복을 주러 왔으니 전교사라는 게 적어도 적(敵)은 아닐 터인데-.
이 통에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을 쓰다 보면 찾아간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비약되기 쉽다. 거기에다 큰절을 해야 하고 몸가짐새까지도 부자연스러워야 하는 따분함. 체통이 있다는 집안일수록 방문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파김치가 되기 마련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육순이 지난 할아버지들을 지도할 때면 이건 온통 뒤죽박죽이다.
도무지 말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 조용히들 듣고 있는 교리시간에 느닷없이 말을 가로막고 권위(?) 있는 해석을 도맡아 하시는 분이 생기고 이에 맞선 다른 분의 또 다른 해석이 급기야는 언쟁으로까지 발전한다. 이럴 때 연령의식에 속박되어 주저하게 되면 방향 잃은 모임이 되고 만다. 당돌하고 날카롭게 좌중을 제지시키고는 간결하게『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입니다』하면서 오금을 박는다.
이런 일에 익숙해지자 어느덧 내게는 연령의식을 무시하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나이가 품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품위가 나이를 정하는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그와 비슷한 어처구니 없었던 얘기 한 토막을 해 보자. 4대째 내려오는 채(蔡)씨 성 가진 교우 몇 집이 있었다. 윗대 조상의 덕택으로 세례 받고 가풍과 웃어른들의 암시로만 이어진 신앙이기에 신앙생활이 크게 불만도 없었고 그렇다고 열화 같은 정열도 가진 바 없었던 말하자면 타조의 날개 같은 타입의 교우들이었다.
그래도 동류(同類)의식은 강해서 누가 자기 교회를 비난하면 참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어느날『회장님 저희 외가 쪽으로 아저씨뻘 되시는분이 한 분 계시는데 과거에 이 지방 면장을 지내셨고 지금은 장로교 장로로 계십니다. 명절 때 외가로 인사를 가게 되면 늘 그분이 우리 교회를 구원 없는 교회라 비난합니다. 우리 재주로는 그분의 말에 대꾸할 수가 없습니다.
제발 그 비난만이라도 듣지 않도록 수고 좀 해 주십시오』하고 부탁한다. 그때 나는 아직 미숙한 초년 전교사였고 당시의 교회 공식 태도도 융통성이 없었던 터이므로 쾌히 승락하고 그들을 따라 그분을 찾아나섰다.
마음은 벌써부터 노획물을 앞에 둔 사냥꾼의 자부심을 갖고 그 집을 들어섰다.
큰절로 맞인사가 끝나자 예의 그 공식 질문이 시작된다.
선친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의 순서에 오자 옆에 앉아 있던 눈치 없는 교우가『이분은 과거 ⅹⅹ를 지내신 ○○씨의 큰 자제분이십니다』소개말이 끝나자『그래? 그분은 나와 막연한 친구지간이었네. 그렇담 자네에게 말 놓겠네』 내것도 아닌 선친의 관직 하나가 내게 이렇게 큰 조당이 될 줄이야! 대화의 자리가 평행선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도무지 이래서야 내 말발이 서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쩌랴. 이왕 이곳까지 왔음에야! 예법을 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그리스도께서는 한 우리 한 목자 되게 간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국내만도 2백여 파의 주장이 다른 크리스찬이 있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 아닙니까?』우선 여기서 쉬고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양반 무엇에 비위가 상했던지 갑자기 호통을 친다.
『에끼 이 사람! 자네 애비와 내가 친구지간인데 어디다 함부로 지껄여대는가!』노기가 충천이다. 순간 양보할 수 없다는 밸이 생겨 야무지게 응수했다.
『어른께는 제가 초면입니다만 세속의 예로 결례가 되지 않도록 큰절을 올렸고 이제 신앙이란 목숨보다 중하여 그 순리를 말씀 올리는 것인데 어째서 화를 내십니까. 선친께 욕됨이 크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하고 분연히 일어서자 당황하여 사죄하는 그를 뒤에 두고 초연히 나와 버렸다. 너희 교회 운운하는 어리석음에 커다란 경종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계속)
◇일선 전교사들의 많은 투고를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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