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손바닥의 체온에 형화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경민.
-참새 어깨는 여전하시군.
이경민은 금테 안경 속에 숨어있는 야릇한 표정으로 첫 인사를 대신한다.
형화는 너무 순간적인 일이어서 흠칫 놀라기는 했지만 놀란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결심으로 태연히 웃어보일 뿐이다.
-이 박사님 사업은 요즘도 번창하신지요.
이경민은 첫 인사에서 별로 유쾌할 리가 없는 말을 듣고 약간은 불쾌한 표정이다.
-이 좋은 날씨에 이 좋은 아침에 그 좋은 젊음을 강물에 탕진할 작정이셨나?
형화는 언제나 이경민만 만나면 도망갈 구실을 찾았었다.
경민을 무척 오랜만에 만났으나 돌연 도망갈 자세를 다듬는다.
형화는 손목으로 눈을 돌렸다.
-어마、시간이 엄청나게 흘렀네.
시계는 어느새 아홉 시 십 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출근시간 십 분 전쯤엔 이미 사무실에 나와서 일할 준비를 완료시켰어야 하잖아. 노총각이 히스테리칼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도 김 부장은 항상 형화에게 화풀이 하듯 참견해오는 것이었다.
저게 내 애인이라면 이러진 못할 거야. 형화는 그렇게 매번 노총각 김 부장의 히스테리를 흘려보냈지만 오늘의 경우는 벌써 출근시각에 지각해서 돌아가게 생겼으니 큰일이었다.
-나는 이 박사님처럼 한가한 몸이 아니니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형화는 돌아서서 급한 걸음으로 달린다.
어서 빨리 달려서 한강 인도교가 끝나는 무렵에서 택시를 합승하든지 자가용의 신세를 체면 접어놓고 지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형화는 자신이 출근시간에 쫓기는 것인지 이경민이라는 바람둥이에 쫓기는 것인지도 깨닫지 못한 채 그냥 황급히 달릴 뿐이다.
다시 피난민이 된 것이다.
(괜히 모든 것이 귀찮아진다. 정말 귀찮다. 달리기나 하자. 어서 가자.)
형화는 자신의 모습에서 왠지 감당하기에 힘든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다. 한강철교에서 뱀꼬리처럼 길게 늘어선 기차가 한 대 달린다. 그 모습이 강물에 반짝거리며 반사되어온다. 아파트가 늘어서 있다.
저 많은 집들을 짓기 위해서는 얼마나 엄청난 양의 모래와 시멘트가 들어갔을까. 아마 돌산 몇 개는 족히 허물어야 했겠지. 아니면 강바닥에는 얼만큼 구멍이 뚫리면서 모래가 실려 나갔겠지. 아파트에는 여러 가지 원색의 이불들이 베란다에 화려하게 내걸려 있다.
세상은 온통 회색이다. 모두가 시멘트 색깔을 잃었을 뿐이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한강 바닥은 시멘트 덩어리다.
고가도로에서는 얕은 차들의 지붕이 재빨리 움직이고 있다.
형화가 계속 달리는 동안 어느새 한강교 입구에 거의 다달아가고 있었다.
푸른 제복의 교통순경이 좀 더 가까이 보인다. 그러나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하필 이경민을 한강 다리에서 만날 게 뭐야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경민과 우습게 헤어진 것이 벌써 일 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다시는 그를 안 만나리라고 이를 악물었던 형화는 다신 안 만나지기를 어지간히 바라고 있었다.
교통순경의 흐루라기 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흐르륵 흐르륵 들려온다.
차가 한 대씩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다리는 이제 본격적인 출발의 기다림으로 수선을 떨기 시작한다.
-헤이 참새 어깨 오늘 반가운 해후를 기념해서 점심 한 번 살 테니 나오겠어? 경민은 계속 쫓아오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이젠 옆에 바싹 다가서 같은 걸음으로 달리는 경민에게 형화는 소리친다.
-아침부터 불쾌해요. 그러면서 형화는 왠지 이유도 없는 불김함으로 오늘 하루는 자신에게 큰 재앙을 가져다줄 것만 같은 예감으로 가득 찬다.
-매우 바쁘신 모양인데 내가 바래다 주지. 저 뒤에 내 차가 따라오고 있거든. 자 어때.
이경민은 서슴없이 형화의 손을 덜썩 잡아 쥐었다.
형화는 그것이 그리 싫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이경민이라는 바람둥이를 걷어차기 위해서는 뿌리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섭게 손을 떨구었다.
형화는 다시 도망자처럼 달린다.
차들이 이젠 제법 재빠르게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있다.
형화는 아무 차나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웬만한 택시들은 합승하는 사람들도 다섯 명씩 꼬박꼬박 타 앉아 있는 것이고 버스들은 문을 열 생각은 커녕 늦은 걸음을 재촉하는 듯이 바쁘게 달아날 뿐이다.
형화는 아무 차에나 손을 흔들었다. 별안간 커다란 크락숀 소리가 형화 뒤에서 울리면서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미소 조、어서 타.
최 상무의 흰 카바가 씌어진 승용차였다. 급히 뛰어들어와 문을 닫으면서 형화는 햇빛에 반사되는 금테 안경의 경민이가 침을 퉤 뱉는 모습을 보았다.
다급함이 가라앉질 않은 채로 형화는 최 상무의 허허거리는 웃음소리와 어디서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누런 빛과 붉은 빛의 범벅이 그녀의 시야를 스쳐지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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