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의 큰 전쟁을 치루고 난 한국에서 그것도 민족상잔의 처절한 비극을 체험한 상황에서 전쟁을 소재로 한 문운대작이 없음을 개탄하는 견해가 이따금 나타난다. 그러나 문예 작품은 체험 자체에서 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체험이 구속 없이 자유로운 인간 정신에 의해 형상화되고 가치와 사상을 내포시킬 수 있는 여건과 시간적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6ㆍ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으로부터 시간적 경과를 헤아리면 이미 4반세기가 넘었으니 시간적 여유는 이미 있었다고 말할 만도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여건은 아직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계속 분단된 상황인 채로이고 이념과 체제에 있어 거의 전시 상태대로 남북이 대치해 있고 양방이 자체 내의 사회 통제를 엄격히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6ㆍ25 소재의 문예 작품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내 독자층이나 국외 독자들에게 크게 공명을 줄 작품이 뚜렷이 없었던 것은 분단된 채로의 통제 사회라는 발표 여건 때문일 것이다.
근년에 카나다에서 한국인 신부 고종옥(마테오)씨가 불어판으로 장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이 소설이 은연중에 반향을 일으키며 중판을 계속하고 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원제가『모든 길은 神에게로』(Toug les CheminsMcnent a Dieu)인 이 소설이 이번에는 불문학자에 의해「예수 없는 十字架」란 제목 아래 한국어로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작자 자신이 6ㆍ25전선에 출전하여 휴전 성립 때까지 혈전의 현장을 편력하였고 이 소설은 다분히 자전적인 내용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 신변적인 체험기가 아니고 강렬하고 순수한 정열과 주장들을 소설 속에 짜넣어서 6ㆍ25 전쟁과 민족 분단의 비극을 인식하는 건강한 사고 체계를 보여주는 점에서 이제까지 독자들이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작품이 되어 있다.
우선 국내 독자들에게 생소한 이 작자와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시인 구상씨는 머리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일종의 수기체의 내용과 구성으로서 소위 예술적 형상성으로 따진다면 평면적인 서술이라 말하겠으나 그 체험의 생동성과 박진력이 저절로 글적인 전개와 긴장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살육과 증오의 마당에서 주인공이 적의 포로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인간적 대화를 가지는 장면 등 이 작품에 깔린 강렬한 휴매니티가 우리의 감동을 자아낸다.우리 겨레뿐 아니라 인류사의 촛점이었던 6ㆍ25 동란을 소재로 하여 인간과 역사의 비극적 맹점을 파헤치고 나아가서는 궁극의 진리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
이 소설은 6ㆍ25뿐 아니라 일제 말부터의 한국적 사회 현실을 그려 전쟁을 단선적으로 보지 않고 민족의 현실을 문제 삼은 점에서도 견고한 토대를 갖추고 있다.
주인공 태오가 개성 근방 38선 북방의 경기도 농촌에서 천주교인 가정에 태어나 8ㆍ15 해방 직후의 공산주의 치하를 겪는다. 18세의 청년 태오는 그 사회 나름의 건설상을 보지만 신앙의 거부 영신적 가치의 부정 엄격한 사회 통제에 반발을 느낀다. 그는 서울에 와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남하하였지만 이곳의 사회 현실을 또한 개탄한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정체 아래서 벌어지는 혼돈상태, 정당들의 전적인 혼란과 극단적인 대립관계, 지도자들의 암살 인플레와 경제 불안 고급 관리들의 수회, 미군 병사 근처를 배회하는 많은 처녀들을 목도한다.『공산주의에 대한 불신을 체험한 후 나는 또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도 잃었다.』고 태오는 생각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전쟁에 휘말려든 태오는 해병대 하사관으로서 전투에 참가한다. 후퇴하는 전선에서 태오는 인민군 포로 두 명을 감시하게 된다. 어두운 참호 속에서 인민군 장교는 자기도 어릴 때 가톨릭 신자였으나 이제는 악과 고통이 있는 세계를 창조했다는 하느님에 반발하게 되었고 고통에 억눌린 사람들의 불행을 나눠 갖기 위해 공산주의자가 되었음을 말할 기회를 갖는다. 태오는 후퇴하는 아군의 작전 사정으로 곧 사살해야 할 포로를 앞에 놓고서도 편협한 적개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본질에 자리잡고 앉아 잠시나마 대화를 나눈다. 『나는 당신의 말이 나를 감동시켰다는 걸 숨기지 않겠소.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천주께 대한 신앙을 포기할 만한 이유가 되지 않소… 고통을 이기는 사랑 따위도 인정해야 되오. 하루 날씨가 나쁜 까닭으로 일주일 동안 날씨가 좋았던 것을 잊고 단 한 가지의 불행 때문에 여러 해 동안의 행복을 잊어야 하오? 어떠한 것에서나 거기에 감추어져 있는 독특한 은혜, 천주님의 섭리적인 손의 자취를 발견할 줄 알아야 되지 않소?』이렇게 말한 태오는 인민군 포로의 팔에다 총을 쏘아 사살을 끝낸 것처럼 위장한다. 전선을 헤매면서 태오는 누구를 위해서 동족 간에 이처럼 피를 흘려야 하느냐고 마음 속으로 늘 반발한다. 죽어가는 인민군 전사를 만나면 원하는 대로 물을 먹여주고 이야기를 걸고 자기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무신론적 인도주의자의 무덤을 만들어준다. 태오가 지닌 신앙은 선민적 오만이 아니다.
토착정신사 속의 불교와 유교에서도 발견되는 진리들을 존중하고 무신론적 반발자들 속에서도 그들이 공산주의자가 되기까지의 분노에 찬 과정을 수긍하고 동정하며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실천적 책임 문제를 먼저 반성하고 자책한다. 이것이 그의 신앙 태도이다. 마침내 휴전이 되고 군대에서 제대했을 때、태오는 자기 가슴에서 훈장을 떼어내고 그리고 몹시도 사랑했던 숙과 결혼하는 일도 단념한다. 그의 수많은 전우들이 전선에서 죽었고 그도 상대편 군인들을 죽였다. 그러한 속에서 덤으로 받은 생명처럼 살아 돌아온 태오로서는 세상을 더 절실하게「더 낫게 사랑하고자」사제가 되는 길을 택해 신학교에 들어간다.
한국의 현대사와 인도주의와 전쟁에 대한 저항과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영신적 구원을 추구한 이 소설의 주제의식과 체험을 통한 설득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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