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민학교 1학년이던 57년 어느 날 갑자기 현기증과 함께 전신이 마비되기 시작하였다. 전주 00병원의 진찰 결과는 척추 가리에스. 척추뼈가 더 굽지 않도록 석고 붕대를 감은 채 8개월 동안 입원 치료 후 퇴원. 그러나 완쾌되었다던 내 등뼈는 산봉우리처럼 솟아 올랐고 석고 붕대로 오랫동안 누워 있던 관계로 다리의 혈관은 굳어져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나는 불구자가 되었다.
꼽추에 앉은뱅이가 된 자식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앉으신 부모님은 이제는 더 이상 따뜻한 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차라리 죽어버리라는 말씀에 얼마나 서러워 울었던지…
학교에 못 가게 된 앉은뱅이 다리를 원망하면서 나는 집안 구석에 박혀 유령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척 한분이 찾아왔다. 군산 미 공군 비행장에서 기름을 헐값으로 구입해서 남해에 있는 섬 사람들에게 팔면 큰 돈을 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빚돈을 얻어 친척 아저씨를 따라 가셨다. 그러나 군산역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게 하고는 돈과 함께 사라져버린 친척 아저씨…아버지는 홧병으로 자리에 누우셨고 빚에 쪼들린 우리집은 싸구려 월셋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굶기를 밥 먹듯 했다.
배 고픔에 허덕이는 동생들을 바라보며 나는 일어설 것을 결심했다.
벽에 박힌 못을 휘어잡고 발을 떼어 보았으나 힘없이 주저앉아 버리는 원망스러운 다리.
밀린 방세를 못 내려거든 나가라는 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끈질기게 걷는 연습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남의 집 주방일과 세탁일로 우리 형제들의 배 고픔을 근근히 면해주시던 어머니가 맹장염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59년 초봄, 나는 비틀거리며 한 발씩 걷기 시작했고 차차 지팡이 없이 걷게 되었다. 약 한 첩 주사 한 번 맞지 못한 내가 걸을 수 있다니…나는 한없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리로 나오니 7월의 뜨거운 한여름에 소년들이 얼음 과자를 팔고 있었다. 50개 내지 백 개씩 통에 넣고「아이스케키 얼음 과자」를 외치는 내또래의 소년들. 나는 용기를 내어 얼음 장사에게 다가갔다.「다른 애들보다 많이 못 팔겠구나. 저쪽에 통이 있으니 골라와」나는 떨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10개를 받아 넣었다. 그리고는 얼음 장사의 폼을 내며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얼음 과자! 하고 부르는 소리에 반가와서 서둘러 가자면 어느 틈엔가 재빠른 소년들이 뛰어가서 파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얼음통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나의 생김새가 꼭 못 생긴 얼음통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돈을 벌 수 있었다. 얼마 벌든 3분의 1은 꼭 저축을 했다. 나는 기뻤다. 내 나이 11살, 이 앉은뱅이 꼽추가 배 고픈 우리 식구들을 배 부르게 먹일 수 있다니 나는 국민학교 5학년이 된 형의 학비도 대고 싶었다. 나는 공부는 못했지만 형과 동생들만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그러나 여름은 길지 않았다. 나는 길거리로 나가 구두 닦는 모습을 열심히 익히고 돌아왔다. 구두 닦는 순서와 광 내는 기술을 생각하며 구두통을 만들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거리로 나갔다.
처음에는 기술이 없어서 핀잔도 받고 제 구역에 들어와 닦는다고 코피까지 나도록 얻어 맞으며 구두통이 부숴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걱정하시는 부모님께는 넘어져서 다쳤다고 말하면서 안심시켜 드리곤 했다. 몇 일 후 나는 등록증을 걱정하면서 어느 식당 주인의 부탁으로 구두를 닦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그 무서운 구두닦이가 달려와 옆구리고 등이고 다리고 할 것 없이 발로 차는 것이었다. 나는 숨이 막혔다. 나는 피가 흐르는 채 울면서 달려들었다.
식당 주인 아저씨는 경찰서 보안계로 나를 데리고 가서 가두직업 등록증을 내주셨고 소년과 순경은 내게 구역을 배치해 주셨다. 나는 나의 구역인 전다방에서 성실히 일하기 시작했다. 저축도 하고 나보다 불우한 구두닦이와 넝마주이, 거지를 선도하기도 했다. 다방을 드나드는 분들은 자주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있었다.『불구자나 가난한 사람이라도 정직하고 성실하면 우리 지역사회에는 꼭 그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부지런히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불우한 동료들에게 용기를 갖고 성실히 살자고 말했다. 차차 우리들은 형과 아우처럼 가까워졌다. 그들은 이제 나보다 저축심이 강해졌고 누구나 그들의 성실한 생활 태도를 몸에서 느끼게 되었다. 5월 5일 이리경찰서 보안과 회의실에서 가두직업 소년들이 모인 가운데 서장님으로부터 모범소년 표창장을 받았다.
나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빈혈과 척추뼈의 아픔 속에 장질부사가 겹쳐 10여일을 혼수상태에 있다가 겨우 깨어났다.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공군에 입대했고 동생들은 중학교와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구두를 닦았다. 68년 5월 8일 어머니날에 이리 시민의 추천으로 장한 아들이라는 표창장을 받았다.『표창장, 위 어린이는 불우한 환경에서 갖은 난관과 애로를 무릅쓰고 동생들의 교육과 극빈의 가정생활 유지에 불굴의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인근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할 뿐 아니라 불우한 청소년을 선도하여 타의 모범이 되므로 가정주간을 맞이하여 이를 높이 찬양하며 표창함. 이리 서장』
박수와 후라쉬가 터졌다.
보잘 것 없는 꼽추에게 너무나 큰 영광이었다. 그 후 전북 전주에 세워진 BBS 기술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공민과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의복과 숙식은 물론 전 학비까지 무료로 기술과 학문을 가르쳐 주는 곳이었다. 글도 모르던 내가 공민과에서 한글을 배우고 지금은 이 수기를 이렇게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2년간 시계 수리 기술을 배운 나는 72년 6월부터 이리경찰서와 여러분의 후원을 받아 저축한 소자본으로 제일시계점이라는 어엿한 시계방의 주인이 되었다.
형님은 공군 상사로서 국토 방위에 여념이 없고 동생들은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기도 하고 전자공업에 종사하기도 한다. 모두들 지역사회의 일꾼으로 자라난 것이다.
각고의 노력 14년.
오직 모든 분들께 감사드릴 뿐이다. BBS 어른들 경찰서의 여러분과 우리 불우한 지역사회의 동료들, 그리고 잘 자라난 우리 부모 형제들에게 감사드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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