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어날 때부터 불우하여 호적조차 없이 가난한 이모의 손에서 잡풀처럼 자라고 있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은 국민학교 6학년 때 받은 숙이의 친절이다. 점심시간이 되어 운동장에 나가려 할 때 책상 속에 웬 낯선 도시락을 발견했다. 누군가가 잘못 넣었나 보다 하고 꺼내 놓으려 할 때 숙이는 내 손을 가만히 잡는 것이었다.
『그렇게 점심을 걸르면 안 된다구. 엄마가 싸 주신 거야. 반찬도 똑같이 해서 매일 싸 주신댔어. 어서 먹자 길순아.』
목이 메어 훌쩍이고 있는 내게 담임 선생님도 가까이 다가오셨다.
『숙이 같은 좋은 친구가 있는 건 길순이가 착하기 때문이야』
그날 방과 후 선생님은 나의 어려운 환경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지 1년도 못 되어 돌아가셨다는 것 어머니는 나를 이모한테 맡기고 강원도로 장사를 떠나셨고 오빠가 있긴 하지만 어디론지 가버렸다는 것. 이모는 헌 책이나 참고서도 얻어다 주시고 휴지를 꿰매서 공책도 매주시는 친절한 분이라는 것을 모두 말씀드렸다.
『네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아프구나. 그럴수록 용기를 잃지 말고 공부를 해야지… 그런 네가 우리 반에서 1등인 게 정말 자랑스럽다. 기운을 내야 한다. 내일부터라도 우리집에 오너라. 내가 과외 공부 시켜 주마. 물론 돈은 걱정하지 말고 왕십리에서 우리집인 현동까지 오는 차비도 줄테니까… 공부만 계속하면 너는 K여중에 문제 없이 합격이야. 알겠니.』
그날부터 나는 선생님 댁에 다니며 일류 여중을 목표로 과외 공부를 하게 되었다. 어떤 날은 어린 마음에 교통비로 군것질을 하고 을지로에서 왕십리까지 걸어가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입학 원서를 내는 단계에 큰 충격을 받는 날이 다가왔다.
호적초본이 없이는 절대로 접수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호적이 없다니…이모가『너는 호적이 없다』고 하실때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는데 호적 때문에 학교에 못 들어가다니…
그럼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담임 선생님은 실망하고 있는 내게 호적이 없어도 입학할 수 있는 학교를 알아 오셨다. 나는 곧 장학생 모집 시험에 1등으로 합격을 했고 이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이모에게 달려갔다.
『에이그 이를 어쩜 좋으냐! 네가 중학교에 가는 건 좋다마는 내가 어떻게 학비를 감당한단 말이냐』
학비는 필요없어요 이모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니까요.
『답답한 소리 마라 아 등록금만 학비라더냐 교복해 입혀야지 책 사 주고 가방 사 주어야지 교통비는 일일이 어디서 타낸다는 말이냐 응』
하는 수 없이 나는 어느 피복공장 직공으로 취직을 하고 중부직업소년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곳은 불우한 청소년들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졸리운 눈을 부비며 배움을 닦는 곳이었다.
한 달을 기껏 일해야 2천 원이 될까말까 하는 월급으로 월 천이백 원만 주면 밤에도 문이 열려 있는 사설 도서실에 밤을 보낸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피복공장도 문을 닫게 되었다. 이제는 도서실 표도 사기 어려웠고 건빵으로 연명하며 공부에 열중하던 최저 생활도 위협을 받게 되었다. 몇 끼니를 굶은 채 도서실에 엎드려 있으려니 글씨도 가물가물하다.
나는 마음껏 울고 싶었다. 하느님 난 뭐예요. 난 왜 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굶주려야 하는 거죠!
그때 탁하고 책상 위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게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도서실에서 몇 번 본 일이 있던 고등학교 남학생이었다.
『나 이 도서실에 가끔 들리는데 너 도와주기로 하겠다. 참고서도 헌 책도 제공하겠어. 너 건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모양인데 내일부터 내 도시락 갖다 줄게. 기운을 내… 넌 고등학교가 목표인 것 같구 난 대학이 목표다. 합격한다는 목표는 같잖아. 우리 열심히 파보자구 어서 먹어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 몰라?』
그는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그 후에도 나를 동생처럼 아끼고 보호해 주었다. 학교에 싸 가지고 갔던 도시락은 먹지 않고 내게 보내졌고 공부를 가르쳐 주기로 했다.
이런 인정의 탓일까. 막막했던 나의 앞길에 한 가닥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중부서의 소년계장님이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소년계의 사환으로 채용되어 직업소년학교를 졸업하고 피어선 실업전수학교에 입학하였다.
나는 가난해도 행복했고 사설 도서실에서 잠을 자도 웃을 수 있었다.
그러는 중에 무허가 직업소개소 일제 단속 기간을 맞아 나는 계장님의 부탁으로 무작정 상경녀로 변장하여 수훈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아슬아슬한 일보다 내게 충격적인 일은 매일 한두 건씩 생기는 영아 유기사건이었다.
나는 영아를 사직동 영아보호소로 인계하면서 아가의 귀에 소근거렸다.
『울지 마라 난 너의 슬픔을 안다. 나도 너와 다를 것이 없는 걸. 버려진 처지인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니? 내 이름이 왜 길순인 줄 알아? 길에서 주워 왔대서 길순이란다. 네 이름을 뭐라고 지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매정한 너의 엄마가 널 화장실에 버렸으니 말이다』
나는 법원 소년계장님의 호의로 호적을 만들 수 있었고 이 일은 내 일생에서 가장 기쁜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제는 원하는 학교는 어디든지 진학할 수 있다! 나는 계속 근무하고 밤에는 학교를 나가며 남는 시간은 도서실에서 밤을 새우며 공부에 열중하였다.
어느날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심한 기침을 하다가 목에서 무엇인가 불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피였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가난한 이모는 셋방일망정 도서실에서 엎디어 자지 말고 들어오라고 하시지만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이 못 되었다.
죽어버릴까…죽긴 어렵지 않지만 이렇게 죽는 꼴은 얼마나 추악할까. 호적도 찾았는데 죽다니 폐결핵 중등중쯤 보건소에 가서 약을 갖다 먹고 투병해 보자.
이렇게 어려운 때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오빠였다. 비록 작은 아파트였지만 오빠 집에서 요양할 수 있다는 것은 차라리 구원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투병을 하면서 피어선을 우등으로 졸업하자 서울대학교 부설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하였다. 나는 역경 속에 2년 과정을 수료했고 편입학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언제든지 3학년에 편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두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일 년의 연수 과정을 거친 후 지금은 세무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가난 고독 그리고 병고를 이기며 끝내 곧은 마음으로 살아온 나의 길, 이제 이 모든 것은 향학에 대한 집념의 소산이라 할지!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올 여름에 있을 4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겠고. 다행히 합격이 되면 평소 내가 원하던 일 나처럼 불우한 청소년과 부녀자들에게 희망과 재생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직책을 찾아 일할 결심이다. 그 길만이 내게 힘이 되어 주신 여러 학우와 선생님 그리고 직장 어른들께 보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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