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군청빛을 띠고 있는 두툼한 차창은 밝고 어수선한 바깥 모습을 왜곡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란하게 뒤범벅이 된 차들의 크락숀 소리는 이제 어렴풋이 들려올 뿐이며 풀려나가기 시작하는 차들의 대열을 정리하는 교통순경의 호르라기 소리는 그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용산 한강 인도교 입구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의 육중한、그리고 우뚝우뚝 늘어선 아파트들의 자태는 군청빛 차창을 통해 좀 더 묵중하고 말없는 침묵의 형태로 부각되어 있다.
최 상무의 소리 없는 차는 뱀처럼 몇 번 휘어지더니 이제는 완전히 아침의 교통마비에서 빠져나왔다.
차는 지루했던 체증을 털어버리기나 하는 듯이 휑하니 뚫린 아스팔트길을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한다.
-지옥 구덩이 속에서 붙잡은 파뿌리 같아요.
형화가 말을 꺼내자 최 상무는 피식 웃더니
-파뿌리라면 금방 끊어질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미스조를 이 길바닥에 내려놓고 나 혼자 가버리는 게 옳은 이치가 되겠군 하고 대답한다.
-이십 분이나 다리 안에 갇혀 있었어요
-지각했다고 나한테 혼날 뻔했군.
-최 상무님보다는 김 부장님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분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 같아요. 일 분만 어긋나도….
차 안에는 음악 소리조차 없어 형화가 아무리 조그만 소리로 이야기를 해도 정확하게 옆 사람에게도 울려나간다.
-이십 분 동안 본의 아니게 한강 다리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며 즐겼겠군.
즐기기는요. 지각한다고 급하게 뛰어가는 사람들에 채여서 넘어지질 않았나 버스들이 뿜어대는 개스에 어지러워 혼났는걸요 뭐.
-안 됐군.
-참 저 이상한 구경을 하나 했어요.
-이상한 구경이라니?
-아침부터 배를 타고 춤추는 미친 여자들이 있던데요.
형화는 이상한 것이 또 하나 있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전혀 쓸 데 없는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상무님은 얼마 동안이나 차가 막혀 있었던 거예요?
-흐흠 나?
그러더니 최 상무는 운전사도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는 것이다.
-나야말로 이상한 구경을 했지. 우리 앞에 가던 큼직한 기중기차가 사고를 내는 바람에 우리는 꽉 막힌 뒷차 때문에 빠져나갈 수도 없이 갇혀서 사고 현장을 아직까지 지켜보았지.
-네?
형화는 두 눈이 둥그래져서 놀라며 최 상무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전혀 흥분한 기색이 없이 태언한 가라앉음이 보일 뿐이다.
-기중기 옆에는…잘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검은 베레모 같은 모자를 쓴…조금은 특색이 있어서 얼핏 주의깊게 보았었거든…그런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따라가고 있었다.
워낙 복잡한 때여서 늘어선 차들 사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 사이를 조심스럽게 달리고 있었을 거야.
내가 신문을 읽고 있다가 문득 그 사람 걱정이 되어서 다시 쳐다보았더니 자전거가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리더니 기중기 앞으로 가려지지 않겠어.
난 아마 기중기 앞에 공백이 생겨서 빠져나오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지.
그런데 바로 뒤에 끼익 하는 소리와 쿵하며 무언가 나가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만 사고가 났지 무어야.
형화는 차가 막혀서 버스 속에 앉아있을 때라든가 운전사들이 거 아침부터 사고는 무슨 사고야라고 고함 칠 때도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그리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저놈의 차들이 빨리 빠져나가야 지각을 하지 않고 제 시간에 사무실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조바심뿐이었다.
-사람은 그래서 많이 다쳤나요?
-다쳐?
최 상무는 다시 한 번 픽 웃더니
-박살이 났더군.
하는 것이다.
형화의 온 몸에는 서리 같은 소름이 돋아오른다.
얼핏 눈가를 스치던 그 경민의 퉤하고 침을 뱉던 모습과 함께 범벅이 되었던 붉은 색의 영상은 바로 검은 베레모 같은 모자를 썼더라는 자전거 주인의 혈관에서 쏟아져 나온 피였다는 것이 충격을 주는 것이다.
차는 돌아가는 삼각지 밑을 통과해서 남영동을 향해 달린다.
-아, 다 지어가는군.
최 상무는 큰길 오른쪽 편에 십 층이 넘는 건물을 쳐다보며 대견스러운 듯이 큰 소리로 말을 꺼냈다.
-상무님 이제 사무실은 언제 이전하게 되는 겁니까?
젊은 운전사가 묻는다.
-글쎄 적어도 한 달 안에는 옮기게 되겠지.
-그동안 집 짓는데 물이 모자라서 고생들이 심했나 보던데요.
-말도 말게. 어제 그나마 밤새도록 비가 퍼부었으니 말이지 오죽하면 썩은 물을 날라다가 공사를 했다네.
-허지만 이 정도 비가 와서야 어디 댐이나 채웠겠습니까?
-그러게나 말일세. 요즘 세상은 어찌 된 건지 예전 같지가 않아. 대기오염 때문에 기온이 변한다는 말은 당치도 않은 것 같은데도 역시 그 이유밖엔 댈 것이 없어. 이렇게 가뭄이다 더위다 사람을 괴롭히는 때가 어디 있었겠나.
문득 형화는 주말인 어제의 일을 기억했다.
청평댐의 물결은 잔잔했고 초록빛의 그 물을 보며 기식이는 저 물은 썩었을 거야 라고 말했었다.
뿐만 아니라 청평댐 아래의 강바닥은 자갈이 드러나 있었고 수문 주위는 그저 물 기운에 펑하니 젖어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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