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짐승도 삼백이요 길짐승도 삼백이라 꿩의 모습 볼짝시면 의관은 오색이오 별호는 화충이라」이것은 장끼전의 한 구절이다. 꿩은 보통으로 사람을 멀리하여 숲 속에서 사는 야생동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꿩을 지금 집에서 기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사육법을 체계화하여 책으로도 펴낸 바 있다.
양계보다 훨씬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꿩 사육. 오늘도 그 보급에 여념이 없는 나는 애초에는 이 방면에 너무도 관계가 먼 한 헌병 중사였다.
그러니까 14년 전 군에 있을 때였다.
운전병의 급커브로 찦차에서 졸고 있던 나는 차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치게 되었다. 야전병원에서 수도육군병원으로 다시 제삼육군병원으로 옮겨지는 중에 부모님들의 경악을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큰형 창록은 6ㆍ25 때 전사하여 남은 자식이라곤 나 하나뿐인 가엾은 늙은 부모님…외상은 별로 없으나 전문가의 진찰 결과는 척추 신경이 끊어졌다는 것이었다. 성 불구니 뭐니 따질 겨를도 없이 우선 엄습해오는 그 고통은 차라리 악몽이었다. 누울 수도 없어 엎어져 견디어야 하는 나날. 스트리커에 매달리면서부터 어머니의 눈물겨운 간호는 시작되었다.
너무도 큰 고통으로 진통제를 계속 달라고 아우성치는 내게 어머니는 손을 꼭 쥐어 주셨다.
『군의관님 말씀을 명심해야재! 중독이 되면 좋지 않다 안 하시드나. 아프거든 내 손을 꼭 잡거라. 내 팔을 부러져라 잡고 참아야 하는기다』
어머니는 어디서 구하셨는지 이름 모를 탕약을 구해 오시기도 했다. 그런 정성의 탓일까? 스트리커에 매달리기 5개월 만에 나는 드디어 손을 짚고 일어나 앉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통닭파티를 열어 주위 사람들과 함께 축하해 주셨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이부자리에 설사를 했고 어머니는 그것을 손으로 긁어내시는 것이었다.
『못 났다, 못 났다, 참으로 이 에미가 못 났데이. 망령이지… 통닭이 다 뭐래이 이 늙은 게 망령이 났지』
나는 차마 어머니를 볼 수가 없어 정신 없이 흥분하고 있었다.
『못한다 못해! 이 짓은 못해 나도 어머니도 이렇게는 못 산다. 위생병! 약 가지고 와라 차라리 먹구 뒈지게 약 줘 으흐흐…』
군의관과 간호원이 달려왔고 스트리커에 매달린 투병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실의에 빠졌다.
죽음, 죽을 수 있다는 또 하나의 길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저 세상에 가서 마음대로 허리도 펴고 훨훨 뛰어다니자. 망설일 것 없다. 나는 남 몰래 모아두었던 약을 입으로 가져갔다. 누군가 갑자기 손목을 잡고 약 봉지를 빼앗았다. 배전우였다.
『김중사 이게 무슨 짓이야! 환자는 자네뿐인가? 나를 보게 나도 척추 환자야. 그래도 자네는 우리보다 낫지 않은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다른 이보다 낫다니 나보다 못한 사람도 있던가.
『자네가 다리를 잘렸나 팔을 잘렸나 왜 이러나 김중사! 단지 척추에 이상이 있을 뿐 치료 여하에 따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몰라서 이러나?』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절망하는 아들을 차마 볼 수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린 어머니. 쭈글거리는 굵은 손가락 마디 사이로 눈물이 자꾸 흘러내리고 있었다. 배전우가 내 손에 화보를 쥐어준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 전우들의 힘있는 모습이 실려 있는 화보였다.
『알았네. 하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열심히 살겠네. 보기에는 벌레보다 더 끔찍하게 보일지 몰라도 정신만은 누구보다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아 보겠네』
그날부터 나는 하모니카를 부는 환자가 되었다. 하모니카는 내게 위안을 주었고 병원 위안회에서는 으레 한 몫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모니카도 놓아야 할 날이 다가왔다. 제대! 나는 마침내 군복을 벗기에 이른 것이다. 화폐 개혁 전 2백만 원의 보상금을 받고 부산 의용촌으로 향했다. 나는 이 보상금을 어떻게 유용하게 쓸 것인가 고심하고 있을 때 박모라는 친구가 나타났다.
『장하이, 자넨 과연 훌륭해. 그러니까 그 돈으로는 자네 개인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쓰겠다는 얘기지? 알겠네. 내가 적극 협조해 줌세』
박군은 나의 손발이 되겠다면서 육영사업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우선 보상금으로 사업을 시작하자며 전기상회를 차린다고 했다.
말이 전기상회지 공공단체에 납품도 하고 공사도 더 맡을 것이니 나는 그저 가게에 앉아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박군에게 맡기고 그를 믿었다.
그 후 나는 결혼을 하였다.
척추 장애자도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데….
나는 예측할 수 없는 중에 부모님의 소원이신 손자며 우리 아기를 불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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