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고개에서 불과 이틀 사이에 10명의 증거자들이 목이 잘리어 그들의 순교를 완수하는 동안 감옥에서도 한 명의 증거자가 맞은 매로 인하여 숨을 거두었다. 그가 바로 허바오로였다.
허바오로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군사로 있으면서 온 집안과 한가지로 천주교를 열심히 봉행했다. 기해년 박해동안 포졸에게 잡히게 되었는데 잡힌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포장이 바오로에게 주리를 불고 주장질과 치도곤으로 70대를 치며 배교하기를 강요하였다. 처음엔 굽히지 않았으나 후에 유혹을 입어 배교하고 말았다. 그러나 곧 자기 잘못을 깨달은 바오로는 진실히 뉘우쳤을 뿐만 아니라 판관 앞에 나아가서 배교를 취소하였다.
이때 관졸들이『말로만 배교를 취소해서는 부족하다』고 하며 한데 섞여 이미 썩은 똥과 오줌을 가리키며 바오로더러『네가 저것을 먹어야 비로소 네 진정을 믿겠다』고 말하였다. 즉시 바오로가 한 그릇을 떠 먹고 또 한 그릇을 떠 먹으려 하자 도리어 관졸들이 그만하면 족하다고 말렸다. 이번에는 관졸들이 십자가를 보이며 배교하지 않았다는 표시로 그 앞에 절할 것을 명하니 바오로는 쾌히 십자가 앞에 부복하여 그의 배교의 취소가 진정임을 증명하였다.
포청에 갇힌 이래 바오로는 수 개월 동안 무려 치도곤 130도를 맞아야 했다. 이 때문에 결국 옥 중에서 선종하니 때에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렇게 허바오로는 인자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사죄를 받을 뿐더러 순교란 격의의 은총까지 받게 되었다.
김안당은 경기도 광주 구산 사람이다. 이 집안은 이미 여러 대 이래 구산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꽤 유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삼형제 중 맏이였던 안당은 성품이 온순하고 너그러웠으며 아직 외교인이었을 때부터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았다.
모친은 외인으로서 세상을 떠났지만 다행히 부친은 중년에 이르러 입교하고 선종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자녀들도 입교하게 되었고 안당은 중국인 유 신부로부터 직접 영세하였다.
안당은 고향에서 수제하는 것이 여의치 않을 뿐더러 성사를 좀 더 용이하게 받으려는 의도에서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서울에 집을 사 갖고 이사했다. 그리고 집에 조그마한 경당을 마련하고 한동안 신부를 모시기도 했다. 열심히 이웃을 권고하였고 비록 자신의 생활이 넉넉하였을지라도 세상 재물에 개의치 않았다.
그러는 동안 상처하고 재혼하였다 그가 체포된 것은 기해년도 다 저물어 가던 섣달 20일경이었다. 때에 그의 집은 동대문 밖 마장 안에 있었는데 배신자의 고발로 포졸들이 달려들어 안당과 그의 사촌 김스데파노를 잡아갔다. 스데파노는 시골에서 다니러 왔다가 변을 당했고 안당의 아내와 딸은 피신하여 구산으로 돌아갔다. 그 후 안당의 가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안당은 감옥을 마치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여기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하였고 따라서 옥중 생활 14개월 동안 살아보겠다거나 석방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한다. 외교인 죄수들까지도 그의 설교를 즐겨 들었다고 하며 그의 설교가 아주 감명적이어서 그 중 두 명이 입교하게 되었다.
한 번은 문초 때 안당이 판관에게『당신의 모든 문초와 권고에 대해서 대답할 말은 한 가지뿐입니다. 즉 나는 천주교인이고 또한 천주교인으로서 죽겠습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기나긴 옥중생활 끝에 결국 1841년 윤3월 8일 포청에서 47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그의 시체를 거둔 교우들은 한결같이 그의 교수치명(絞首致命)을 입증하였다. 왜냐하면 안당의 목에 교수된 흔적이 뚜렸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시체는 구산 가족묘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838년 말에 시작한 박해는 1841년 김안당의 순교로 종막을 고하였다. 기해년대 박해는 강원 충청 전라 등에 전반적으로 미쳤으나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가장 심했고 따라서 순교자가 가장 많이 나온 곳도 서울이다. 서울에서 대략 2백 명의 교우가 잡혔고 그 중 50여명이 참수되었고 60여명이 목이 졸리어 또는 매로 또는 병으로 옥사하였다. 이 중「기해일기」에 오른 순교자의 수는 78명으로서 그 중 8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복자가 되었다.
박해 후 한국 교회의 참담한 광경은 이루 표현키 어려운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는 세 분의 목자를 모두 잃음으로써 다시 목자 없는 고아가 되어버렸다.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 지도급 평신도들도 거의 다 희생되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현갸오로 이도마 채베드로 등 선교자들의 측근자가 몇 명 살아 남음으로써 이후 교회 재건을 꾀하고 선교사 영입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편 선교사들은 이미 몽고에 와서 우리 신학생들과 함께 입국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페레올(고) 신부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김대건이 한국 최초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1845년 10월 주교신부와 함께 입국한 김대건 신부는 이듬해 선교사들을 위한 새로운 입국로를 개척하고자 영평도 앞바다에 나갔다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붙잡혔다. 이래서 병오(1846)박해가 시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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