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레폰은 무릎을 탁 치며『알았다!』고 했습니다. 소트라테스는 빙그레 웃었습니다.『나도 이제부터 당신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겠으니 받아 주십시오』하고 가이레폰은 애걸했습니다. 세상에서 위대한 교사가 소크라테스를 닮지 않고는 될 수 없습니다.『너 자신을 알라』하는 그 너 자신은 무엇입니까? 바로 무지(無知)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지를 자각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많이 아는 듯합니다만 실상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모르는 것을 안다』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비결입니다. 모르는 것은 가난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퇴계 선생 같은 분은 효도를 못하고 공부를 못해서 부귀영화의 벼슬조차 사양하기 수십 번에 이르렀습니다. 정말 그가 불효자였습니까? 무식자였습니까? 그는 모르는 것을 알았을 따름입니다. 자기의 무지와 가난을 자각했을 따름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교실 안 풍경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한 시간 수업을 마친 선생님은 아동들을 향하여 말을 합니다.
『이번 시간의 수업에서 잘 모르거나 의문이 나는 것이 있으면 질문을 하세요』그러나 학생들 가운데서 손을 들어 질문을 하는 학생은 의외에도 그 반에서 성적이 뒤떨어지는 학생이 아니라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란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질문을 말하는 학생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학생이란 것입니다.
인간 형성을 교육의 주안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교육은 행동양식의 훈련이나 행동습관의 체득에 있다고 봅니다. 훌륭한 기술자를 훈련한다는 교육 목적은 이러한 교육 개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이 어찌 인간의 행동면 특히 손 끝의 기술로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행동을 주제하고 기술을 지시하는 더 높은 차원의 심의(心意)의 도야가 문제되지 않겠습니까?
슈프랑거는 교사의 역할을 지렛대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거운 물체를 적은 힘으로 능히 움직이기 위하여 그 물체에다 지렛대를 댑니다. 지렛대 없이는 어림도 없는 물건이 지렛대를 댐으로써 거뜬히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교사를 산파(産婆)라고 비유하고 교육의 방법을 산파술과 같다고 했는데 이러한 비유는 다 그럴싸한 비유들인 것입니다. 교육되는 것을 생각하면 영혼적인 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움직이지 아니하고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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