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첫째 신부요 순교 복자인 김대건 신부에 관해서는 목자들도 대충 알고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19세기 말엽의 증인들이 남겨 놓은 증언을 바탕으로 하여 그분의 활동ㆍ체포ㆍ순교 등을 요약하는 데 그치려 한다. 그리고 증언 중에서 그 진실성이 의심되는 사실일지라도 김 신부 생애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을 위하여 여기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대건은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대건은 비범한 열심과 탁월한 재능을 드러냈고 나(모방) 신부는 총명한 이 소년을 대견스럽게 여겨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외국에 유학 보냈다.
신학 공부를 마치고 대건은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우선 요동지방으로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1843년 음력 11월 대건이 변문에 이르렀을 때 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방지거를 만나게 되었다.
그야말로 해후 상봉이었다. 대건은 같이 본국으로 돌아가자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방지거는 아직 박해의 위험이 남아 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곧장 북경길을 재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건은 단독으로라도 입국할 결심을 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하였다.
그러나 주막에서 하루 밤을 지내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간신히 수사망을 벗어나 요동으로 돌아왔다. 방지거는 북경에 돌아오는 길에 변문에서 대건의 편지를 발견했다. 사연인즉 1844년 음력 8월에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방지거는 약속한 시기에 국경에 이르러 대건을 만났고 고 주교를 입국시키기 위해 음력 11월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방지거는 현갸오로ㆍ이도마ㆍ한베드루 등을 대동하고 어김 없이 약속된 기일에 국경에 이르러 주교와 김 부제를 만났다. 아직 국내 사정이 위험하다고 하여 주교는 남겨 놓고 김 부제만을 모시고 모두 무사히 서울로 돌아왔다.
「돌우물골」이라는 데서 수 개월을 지내는 동안 김 부제는 주교와 신부들의 입국에 대비하여 만반 준비를 갖추었고 마침내 현갸오로 이도마 최베드루 등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출범하여 강남에 상륙하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김 부제는 신품을 받은 후 고 주교 및 안(다뷜리) 신부를 모시고 황해를 건너 강경의 황산마을에 무사히 하륙하였다.
2개월 간의 휴식을 취하고 나서 김 신부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그때 김 신부로부터 직접 성사를 받은 교우들의 증언에 의하건대 김 신부의 얼굴은 고아하고 성격은 활발하였으며 체질이 튼튼하고 키가 크고 허위대가 좋았다고 한다.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 지방이었는데 구체적으로 용인의 미나리골 양리의 터골 그리고 서울의 서빙고, 무쇠막거리 등이었다.
1846년 봄 김 신부는 은이 웃마을의 모친 집에 있었다. 김 신부가 서울로 떠나려 하자 모친이 적어도 부활 때까지 있어 주기를 간청하므로 김 신부는 부활 후 월요일에야 서울로 떠날 수 있었다.
서울에 올라온 김 신부는 음력 4월에 주교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하여 마포에서 배를 타고 황해 지방으로 향했다. 구라파로 가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는 동시에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같이 배에 오른 사람은 임성실 안순명 박성철 김요아킴 김 신부의 복사 엄씨 노씨 도합 7명이었다.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나서 김 신부는 돌아오는 길에 고기를 사 갖고 그것을 말리기 위해 순위도에 들렀다. 마침 중국 어선을 쫓으려고 한국배를 징발 중이었다.
진장이 김 신부배를 강제로 징발하려하므로 김 신부는『어떻게 양반 배를 징발할 수 있는가』하고 큰 소리로 공갈하니『해라』는 말투에 화가난 진장이 하졸을 시켜 김 신부를 체포케 하였다. 하졸이 김 신부의 상투를 잡아 채니 머리털이 풀려 외국인임이 드러났다. (앞머리 두발이 아직 자라나지 않았었다) 김신부는 이어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거기서 문초한 결과 교회일이 드러나서 마침내 서울로 보내져서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포장 이응식은 김 신부의 고상하고 당당한 품위에 감격되어 저녁마다 신부를 불러내어 천주교 얘기를 듣고 외국에 관해 질문하였다. 하루는 중국 배에서 압수한 주교 편지를 보이며『네 글씨와 다르다. 이 편지의 주인을 대라』고 하므로 김 신부는『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입니다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지요』하고 기지 있는 대답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대관들이 국가에 이렇듯 귀중한 인물을 죽이는 것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들 말하였으나 유독 영의정 권교인이가 만일 그를 석방하면 나라가 후환을 입을 것이라고 극언함으로써 결국 김 신부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행렬은 당고개에서 잠시 멈췄다. 김 신부는 자색 겹조끼를 입고 있었고 땀을 무척 흘리고 있었다. 새남터에 이르러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를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희광이들에게『나는 하늘에서 지금처럼 너희를 바라볼 것이다.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시오』하는 말을 끝으로 칼을 받았다. 이때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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