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 유곡면 영성리 논두렁이 구불거리는 조용한 시골이다. 어느날 갑자기 포성이 울려와 아버지와 오빠는 남쪽으로 떠나 그 겨울은 무섭고도 쓸쓸하기만 했다.
바람이 몹시 불어 문풍지가 덜컹거릴 때마다 앓고 있는 어머니는 계속 기침을 하시더니 어린 우리 자매만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며칠이고 무덤가에 앉아 있던 11살짜리 언니는 10리쯤에 떨어진 배천 고모님 댁에 나를 맡기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아버지가 우리를 찾으러 오실 거야 그때까지 잘 참아라. 나는 이모댁으로 간다. 양식도 모자란데 우리 둘이 함께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러나 고모는 매일 같이 아버지를 부르며 울고 보채는 나를 사촌 언니에게 딸려 인천으로 보내 주셨다.
밤이 되자 인민군이 비치는 탐색등이 지나갔다. 우리는 빠른 무릎 걸음으로 남쪽으로 몰려가는 파난민 틈에 끼어 아버지가 계신다는 인천으로 온 것이다.
사촌 언니와 나는 피난민 수용소에서 아버지 소식을 알았고 다음날 나는 아버지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아버지는 부두에서 막일을 하셨고 오빠는 미군 부대에 나가고 있어서 생활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나는 곧 학교에 다시 갈 수 있는 기쁨으로 열심히 집안일을 했다.
나는 고생하시는 아버지께 맛있는 반찬을 해드리려고 부두에 나가 생선 한 마리를 사 왔다. 막 냄비를 불에 올려놓았을 때 동네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납덩어리처럼 생긴 물건을 들고 와 불에 녹여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냄비를 들고 탄 위에 집어 넣으라고 했다.
순간 굉장한 폭음이 울리고 나는 정신을 잃은 것이다.
나는 11살에 오른쪽 한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봄이 되자 왼쪽 눈마저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걱정마라 순화야 이 세상 어딘가에 꼭 네 눈을 고쳐줄 의사가 있을 게다』
아버지는 용한 의사가 있다는 곳이란 소문만으로 나를 업고 달려가셨지만 이 세상 어디에도 내 눈을 회복시켜 줄 의사는 없었다.
동네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방문을 열어 젖히고 달아날 때마다 나는 차차 장님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고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고모님이 아버지를 찾아오셨다.
『동생―서울 가면 맹아학교가 있다는데…전쟁통에도 늘 책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순화를 보니 공부를 시키는 게 좋겠구먼 월사금만 내면 기숙사에서 자고 공부할 수 있다네』
아버지는 당장 나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셨다. 선생님은 무척이나 친절한 분이었다.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걸 손으로 볼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알겠지 순화…』
어린 나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기쁨보다 아버지와 떨어져야 한다는 무서움이 더 컸다.
더듬거리는 서툰 걸음으로 최운화 선생님에게 이끌려 교실을 안내 받은 나는 13살에 1학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십 년…월반을 한 덕분으로 18살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거쳐 26살에 사범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나는 엠마뉴엘여맹원에서 장학금을 받기로 결정되어 대학 진학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보내 주셔야 할 서류가 오지 않아 마음을 조이고 있었다.
어디로 이사를 하셨을까…나는 인천행 기차를 탔다.
그동안 아버지는 자주 면회를 오셨고 부두 노동 대신 생선 장사를 시작하셨다는 말씀을 하신 뒤 벌써 몇 달째 소식이 끊긴 아버지…예감은 맞았다.
아버지는 임진강 근처 조강이라는 마을에 계셨다. 장학금으로 대학에 가게 된 딸의 손을 잡고 기뻐하는 아버지, 그러나 등 뒤에서 빨리 소죽을 끓이라는 퉁명스러운 소리에 나는 아버지가 머슴 노릇을 하고 계신 것을 알았다.
나는 그 길로 서울로 돌아왔다.
앞 못 보는 딸을 업고 애를 태우시던 아버지 맹아학교에 넣으려고 푼푼히 모은 돈을 보내 주시던 아버지 손 끝으로 책 읽는 것을 대견해 하시던 아버지가 그 나이에 남의 집 머슴일을 하시다니.
슬플 때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조재훈이라고 이름을 밝혀 오는 맹인 남자를 따라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내게 맹아학교 입학 절차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왔는데 나는 어처구니 없게도 그에게 내 하소연을 하고 만 것이었다.『안마를 배우겠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편히 모시겠습니다』
『글쎄요 효도하지 말라는 말 같아서 좀 뭣하지만 뜻을 높은데 가지세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오신 분 같은데요』나는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고생하시는 줄 몰랐을 때는 이른바 그 높은 뜻을 가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노라고 단호하게 말했다.『한 알의 진주가 생기기까지는 모래에 상처를 입은 조개가 그 아픔을 못 이겨 수없이 흘리는 눈물이 모래를 쌓고 쌓아 진주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 아픔 없이 진정한 것은 얻을 수는 없습니다. 주제 넘은 말씀입니다만 용기를 내세요』나는 우연히 만난 그 맹인 청년에게서 용기를 얻어 포기하려던 대학에 진학하였다. 전국대학 법과였다.
어느날 최 선생님은 한 사람을 소개했다.
『이리 와 순화 인사해, 우리 학교에 새로 전입하게 된 조재훈씨야』
진주의 비유로 내게 용기를 준 조재훈씨 바로 그였다. 나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강의에 빠지지 않고 남은 시간은 어린 후배들을 가르치며 대학 10년을 마쳤다.
맹인을 위한 교과서가 없어 친구들에게 책을 읽어 받아 그것을 점자로 밤을 새우며 옮겨 치던 일, 그러나 무엇보다 슬픈 일은 아버지가 졸업식장에 못 오신 일이었다. 맹아학교에 돌아와 보니 전보가 와 있었다.「부친 위독 급래」나는 김포로 달려가 아버지 손에 졸업장을 쥐어드렸다.
『아버지 염려 마세요 꿋꿋하게 살겠습니다. 꿋꿋하게…』
몇 시간 후 아버지는 운명하셨다. 재훈씨는 어느 틈엔가 이곳까지 와서 흐느끼는 내 어깨를 잡고 있었다. 나는 결코 진주 조개의 비유를 잊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약속한 대로 꿋꿋이 살 것이다. 앞 못 보는 여러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꿋꿋이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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