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6월 12ㆍ13 양일간 서울 단국대학교에서 열린 제19회 전국 국어국문학 연구 발표대회에서 명지대 김태준 교수가「19세기의 유학생」이란 주제로 순조에서부터 개항 전후의 개안과 그 장애를 중심으로 연구 발표한 내용이다. <편집자>
1, 19세기와 서양 접촉
18세기 말엽 참으로 적은 수의 실학파 학자들 사이에서만 연구되고 있었던 서학은 경기도 양근의 이벽을 중심한 작은 한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북경의 주교당이었고 아직도 그 서교가 중국 이외의 어떤 서구라파의 종교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정도였다.
그들은 한문으로 서교를 수용했고 그것이 당시 조선 전국에서 허락되고 있었던 서양적 수용의 전부였으며 그 젖줄은 오직 오직 북경 주교당과의 연결에서만 가능했다.
이것은 학문적 연구의 범주를 넘지 못했다 할 것이다.
그러나 19세기로 들어오면 사정은 달라져서 이 서양에의 연구는 종교로 확장되고 1801년에는 천주교 대박해가 일어날 만큼 교세가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19세기는 천주교의 금지와 신회교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801년 당시의 실권자였던 김대왕대비는 이 해 1월에 천주교를 금하고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하여 오가작통법을 시행했다. 2월에는 천주교의 첫 번째 대박해인 신유사옥이 일어나 이승훈을 비롯한 양인 학자들 권철신 이가환 정약종 및 중국인 신부 주문모 등이 사형을 당하고 정약용 정약전 형제가 귀양되었다. 또 이 참상을 북경의 주교에게 보고하려던 황사수은 백서를 빼앗기고 순교하였다.
이어서 개항 전까지는 소위 4대 박해가 계속되고, 이러한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서양 나라들과의 교섭은 1870년대 후반에는 드디어 개항에까지 몰고 가지 않을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19세기 초 정약종의 아들이었던 정하상은 로마 교황에게 직접 편지를 내어 천주교 조선교구의 설치를 호소하여 그 결실을 보게 했고 신부의 초청을 위하여 북경까지 1만8천 리를 20번이나 밀내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주의를 끄는것은 신학 공부를 위해 1836년에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던 최양업 김대건 등의 예로 이미 이들은 북경을 지나 더욱 서양에 가깝게 접촉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라틴어와 불어 등 서구어로 서구문화에 접하는 새로운 시대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의 실학파 학자들과의 관련을 유지하면서 일편으로는 서구 언어로 사색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함으로써 이제 조선 문화 속에서 다시 한문화권의 일체성을 회복하기는 어려운 문화의 새 장면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유학생 김대건은 그가 남긴 25통의 편지 가운데 한문으로 쓰여진 2통을 제외하고는 모두 라띤어로 썼으며 최양업은 라띤어는 물론 불어가 더 유창하여 이들 서구어로「달레의 교회사」자료를 작성했다.
2, 서양 접촉의 두 방법
팽창하는 서양 문명과 동아시아의 만남의 시작은 적극적으로 대항해를 감행했던 서양인들에 의해 실현되었다. 서양인들의 아시아 진출의 동기의 하나는 종교적 정열에서였고 다른 하나는 상업적 이익에서였다. 이러한 서양인의 동아시아 진출 가운데에서 청국이나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가 관심의 예외일 수는 없었고 여러 가지 조건이 이를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접촉의 시도는 계속되었다.
서양과 우리나라의 만남의 두 번째 방법은 일련의 조선인들을 주역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양 문명을 찾아 항해를 감행했던 방식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것은 주로 종교적인 정열이거나 거기에 준하는 서구적 충격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선인을 주축으로 하여 서양문명과의 관계를 살펴가면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의 개안과 갈등을 통하여 개화의 성격뿐 아나라 그 전단계로서의 근세의 성격에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사례연구로서 최양업(1821~1861)과 유길준(1856∼1914) 등 2인을 뽑아 유학생의 정신적 계보를 살피고 19C를 살았던 그들의 개안과 그 장애를 통하여 한국인의 정신적 계보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 두 사람은 유학 지역과 각 시대의 유학생들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설정하였다.
3, 유학생의 정신적 계보
최양업은 우리나라 쪽에서 서구문화를 배우기 위해 외국 유학을 떠나게 된 최초의 유학생이며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유학생으로 알려진 유길준보다 근 반 세기나 앞서는 일이 된다. 그는 중국 대륙으로 통하여 주로 프랑스·영국 등 서구문화와 접촉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 중의 한 사람인 동시에 이런 대륙의 길을 밟아 종교적 목적으로 유학했던 50여명의 19세기 전반 유학생들의 선편을 잡았다.
유길준은 개항 이후 일본을 통해 서양문화에 접촉했던 최초의 관비 유학생의 한 사람이며 이후에 계속되는 수백 명의 한말 유학생의 선배가 되었다. 또 최양업 시대의 종교적 목적의 유학과는 달리 그의 유학 목적은 신학문의 섭취였으며 이렇게 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주역으로 하는 대서양 접촉의 항해는 일본을 통하여 주로 미국으로 연결되는 길을 취한다.
대륙을 통하여 서구에 이어지는 길과 일본을 통하여 구미로 이어지는 다른 한 길, 두 개의 통로를 가지게 되었다.
이를 편의상 대서양 접촉의 대륙 항로와 태평양 항로로 이름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때 대륙 항로는 주로 천주교의 신부가 되려는 이들의 종교적 목적에서 개척된 길이며 포르투갈령 조차지인 「마카오」와 마닐라의「피낭」등이 그 유학지였는데 이로부터 1886년까지 이 두 곳에 유학한 자의 수는 47명이었다. 이들은「라띤」어를 비롯한 유럽 대학들의 교육과정에 따른 신학교육을 받았고 여기서 수 명이 풍토병으로 사망한 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신부로 양성되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서 한국의 천주교회는 그 터를 다져갔던 것이다. 이 길은 바로 서구에 통하는 지름길로「마카오」는 포루투갈을 위시한 서양인들의 극동 진출의 거점이었으며 해방 뒤까지도 마카오 신사니 마카오 양복이니 하여 우리에게 낯 익은 단어들이 유행하는 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하는 태평양 항로는 개항 이후의 신문화의 수용을 위한 정부적 차원에서 개척된 길이며 일본을 통하여 서양에 접촉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서로 다른 조건하에서 대서양 접촉에 몸소 나섰던 두 사람의 조선인을 생각할 때 그들이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라는 감이 든다.
최양업은 12년 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천주교 신부가 되어 돌아와서는 상투를 틀고 겹조끼와 무명 바지를 입은 전통적 조선인의 모습으로 천주교 전교에 정열을 쏟았다. 이에 대하여 유길준은 4년에 걸친 일본과 미국 유학을 마치고 왼편 가르마를 탄 신식 머리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반듯하고 양복을 뽑아 입은 모습으로 개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상투를 틀고 두루마기를 걸쳐 입은 최양업과 가르마를 타고 나비 넥타이를 맨 유길준의 두 사람은 그 외모처럼 그들의 이미지도 반드시 다른 것이었을까 오히려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우월한 서양 문화의 도전을 받고 있었던 조선의 젊은이로서 기꺼이 나아가 이 강력한 도전에 응답하려 했고 고국에 돌아와 서양 문물의 소개와 자기 민족의 교화에 시종했다는 점에서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 옳을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전반부터 한 말에 걸쳐 해외 도항자의 대다수에게는 공통한 동기와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통의 분모를 통하여 이에 기초한 정신적 발전의 흔적을 살피면 우리나라 근대의 정신은 확실한 윤곽을 가진 일련의 움직임으로 포착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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