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가 병오년(1846)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참수 치명한 후에도 감옥에는 아직 8명의 증거자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김 신부와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어 잡혀온 이들이었다.
그들도 한결같이 끝내 굴복하지 않으므로 정부는 급기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 중 현석문만은 소위 사학의 괴수라 하여 김 신부처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처형하였고 나머지 7명은 옥에서 목을 옭아 매어 죽이게 했다.
현갸오로는 대대로 벼슬을 지내던 서울 중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현흠이 신유년(1801)에 순교한 이래 갸오로는 어려서부터 모친과 누이와 한 가지로 열심히 봉교하였다.
이 나라에 주교신부가 아직 한 분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을 무렵에 현갸오로는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 당시 쟁쟁한 인물들과 늘 교회 일을 상의하였고 무엇보다도 선교사를 모셔 오는 일과 방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중대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로 인하여 갸오로는 위험한 국경지대를 여러 번 드나들면서 김대건 최양업 등 신학생을 외국으로 떠나 보내는 한편 국경에서 대기 중이던 주교신부를 영접하게 되었다. 기해년 박해 때 현갸오로 회장은 정 신부에게 복사하고 있었는데 갸오로는 주교신부를 따라 자헌하여 순교할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러나 살아 남아 앞으로 목자가 없을 교회를 돌보라는 선교사들의 유언을 따라 이후 3년간 갸오로는 포졸들에게 쫓기며 변명과 변장을 해가면서 깊은 산 중의 극빈한 교우 오막살이 집에서 나날을 보내야 하는 등 이루 표현키 어려운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렇게 막다른 처지에 있으면서도 갸오로는 지방을 두루 다니며 애긍을 거두어 옥 중 교우들의 사식을 돌보고 순교자들의 신체를 거두어 안전한 곳에 이장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을 수집하라는 주교의 분부를 잊지 않고 스스로 자료와 증언을 수집하고 또한 그간 최비리버와 정하상 등이 수집한 것을 모아 책으로 정리하며 모든 교우들로 하여금 두루 읽게 하였다.
갸오로가 지방으로 피신해 다니는 동안 서울에서는 식구가 다 붙잡혀 순교하였다. 먼저 누이 분다가 참수 치명한 데 이어 김데레사와 은석 처자가 옥사하였다. 홀로 남은 캬오로는 박해 후 경향 각지를 두루 다니며 교우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냉담자를 찾아 다시 수계할 것을 권면하여 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갸오로에게는 목자 없는 교회에 선교사를 맞아들여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이 가장 시급하였다.
그리하여 국경과 북경에 사자를 파견하여 그간 두절되었던 중국 교회와의 통신을 부활시킴으로써 마침내 김대건 부제를 입국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는「돌우물골」에 집 한 채를 마련하고 나서「상해」로 건너가 주교신부를 영접하여 온 후 실제로 신부 댁 주인 노릇을 하여 교중 일을 맡아보았다.
1846년 봄 김 신부의 체포 소식을 전해 들은 현 회장은 즉시 김 신부 집을 외인에게 맡기고 그 집에 있던 여교우들을 가마를 태워 이아가다 집으로 피신시키는 한편 자기는 사포 서동에 새 집을 마련하고 그곳에 숨었다.
그러나 포졸들은 가마를 메고 간 사람들을 찾아내어 이 아가다의 집을 알아냈고 이 아가다의 집에 남아 있던 우 수산나를 앞장 세워 현 회장의 새 집을 습격함으로써 현 회장을 위시하여 여교우 5명을 모두 체포하여 우포도청에 가두었다. 때는 윤5월 17일이었다.
포청에서는 우 수산나가 집을 가르쳐 주었다고 해서 여교우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현 회장이 이 광경을 보고『천주를 위하여 순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하고 타일러 여교우들을 화해시켰고 마침내는 모두가 훌륭히 순교하게 되었다.
현갸오로는 포청에서 5월 23일과 26일 양일 사이에 여섯 번의 문초를 받았다. 첫 번 문초에서 석문은『제 자호는 덕이며 나이 겨우 다섯 살에 아버지 현흠이가 신유년 사학에 복법이 되었고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돌래로 가서 살다가 열네 살에 서울로 올라와 약국으로 업을 삼았더니 기해년 사옥에 저의 성명이 모든 초사에 나오는고로 이재영이라고 성명을 고치고 호서와 호남으로 도망하며 살다가 재작년에 서울로 올라와 사포 서동 김소사 집에 숨었다가 필경 잡히게 되었습니다』하고 그간의 피신한 경위를 자백하였다.
그 다음 문초에서 석문은 김대건을 유학 보냈고 또한 귀국할 때에 그를 인도하였으며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피신한 사실 등도 아울러 자백하였다.
7월 29일 정부는 석문을 모반죄인으로서 군문효수형에 처할 것을 명하였다. 선언문에 이르기를『마땅히 모반한 법률로 시행할 것이나 저 같은 더럽고 작은 자를 왕부까지 번거롭게 할 것이 없으니 대건의 예에 의하여 군문으로 내어주어 머리를 잘라 매달아 민중을 깨우칠 것이다』고 하였다. 동일부로 어영청에서 석문을 사장에다 크게 주민을 모아 머리를 잘라 매달아 민중을 깨우쳤다고 보고해 왔다. 때에 석문의 나이 50세였다. 후에 교우들이 현갸오로의 신체를 찾아내어 왕십리에 이장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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