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을 노상 머리에 이고 발아래 깐 채 살면서도 그걸 가끔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
하기야 하늘만 쳐다보다가는 개천에 빠지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땅만 내려다보다가는 날아가는 제비한테 치이는 수가 있다. 이래저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하늘과 땅을 항상 적당히 의식할 만큼의 사려는 갖고 살 필요를 느낀다. 왜 이런 뚱단지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가.
하늘의 천문학과 땅의 하관식을 접할 때마다 새삼스럽게 아차 하는 깨우침이 들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오스트랄리아의 어떤 천문대에서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전자 망원경으로 우주를 한참 쳐다보고 있노라니까 까마득한 하늘 저 멀리 새로운 은하계가 두어 개 더 보이더란 이야기다. 지구를 안고 있는 태양계서 그리고 그 태양계를 수억만 개 품고 있는 은하계가 지금 이것 말고도 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것이 저 잘났다고 별짓 다 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는 그러면 뭐란 말인가 그리고 이 좁쌀 알갱이만한 땅덩어리 위에서 복닥거리며 팔딱팔딱 웃었다 울었다 방정을 떠는 인간이란 또 뭐란 말인가.
그러나 하늘만이 아니라 땅을 내려다봐도 그런 깨울침은 마찬가지다.
부고장이 와서 장례식엘 가면 어쩌다가 장지엘 따라가게 된다. 구덩이가 패이고 네모 반듯하게 자리가 마련되면 이윽고 관이 내려지고 흙이 뿌려진다.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눈물도 웃음도 허망한 일이요 영광이나 고통이 차이가 없다.
이렇게 끝나는 것을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동안 그렇게 바동댔을까. 악다구니들 하며 극성스럽게 산 것이 온통 헛개비 노름이었지 않은가.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언젠가는 저 모양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몇 해 전 시청 앞 지하도 층계를 내려가다가 갑자기 죽음을 만난 사람이 있었다.
지하도 입구 옆에 있는 신축 건물 옥상에 매달아 놓았던 큰 몽둥이 하나가 떨어져 지하도 난간에 부딛혔다. 몽둥이에 얻어 맞고 난간이 부서지면서 그 돌이 때마침 층계를 내려가던 그 사람의 머리를 쳐 숨지게 한 것이다. 시퍼렇게 살아있던 사람이 그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늘의 광활함과 땅의 침묵은 이렇듯 인간에게 겸허할 것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삶에 있어 정말로 본질적인 것은 삶 자체이자 삶에 관한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인간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늘 삶 자체보다는 삶에 관한 환상을 쫓으면서 살아간다. 아이가 자라서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그의 머리 속에는 이미 삶에 관한 온갖 환상들이 주입된다. 공부하는 것만 해도 그렇다.
공부나 시험이란 원래가 삶 자체를 제대로 살라고 깨우쳐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공부는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 해야 하는 것처럼 되었고、시험을 잘 치러야 하는 이유는 일등을 하기 위한 것처럼 돼버렸다. 그리고 일등을 하기 위해선 무자비한 배타주의를 익혀야 하고 거기에 몰입하다 보면 그는 어느덧 무서운 어른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런 식으로 타인과 이웃을 대하며 살아가게 된다. 결국 공부하는 것이『너는 흙이니、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한 말씀의 참뜻을 깨우쳐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것에 맹목하게 만들어주는 셈이다. 환상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간은 영구히 삶이 어떤 것인지 깨우치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삶이란『그냥 사는 것』이지 그 위에 입혀진 의상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명의 신비 자연의 아름다움 사랑의 기쁨 헌신의 보람 그리고 죽음의 엄숙함-대충 이런 것이 삶의 본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삶을 너무 복잡하고 크게만 생각할 일은 아닐 것이다.
거창하고 요란하고 굉장하게 되려는 것보다는 조그마하게 조촐하게 겸소하게 되려는 편이 더 잘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오히려 삶 자체를 사는 지름길이고 삶에 관한 환상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지혜일 듯싶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굳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이 아닐까. 그래서 샤를르ㆍ드ㆍ후고 修士는 北아프리카의 유랑민들과 친구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그분들이 그렇게 한 까닭은 삶에 대한 의욕이 없거나 소극적이라서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삶을 진정으로 귀히 여겼기 때문에 그런 길을 걸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늘의 넓이와 땅의 깊이를 접할 때마다 그 중간의 환상적인 바둥거림이 얼마나 우스운 노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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