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문 베드로는 서울 사람이었다 스물두 살 때 교우 처녀 허 발바라와 결혼한 것이 그가 천주교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박 베드로란 교우로부터 입교의 권고를 받고 즉시 개종하고 대세를 받고 수계하기 시작하였다. 아직 한국에 신부가 없었던 때였다.
남 베드로는 금형영의 군인으로 근무하는 한편 조그마한 식료품 장사를 했다. 또한 그의 딸 데레사는 부친이 생계를 위해 비싼 이자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인 유 신부로부터 교회가 그러한 고리대금을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고 즉시 이자놀이를 그만두고 그간 받은 이자도 힘껏 보상하였다. 유 신부로부터 회장에 임명된 후로는 신부가 성사를 주러 지방 교우들을 방문하러 다닐 때 따라다니며 신부에게 복사했다.
기해년 박해 때 외교인 형제들의 도움으로 체포를 겨우 모면했다고도 하고 일단 잡히긴 했으나 형제들의 덕택으로 풀려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베드로는 박해가 그친 후로는 점차 냉담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교우들을 첩으로 거느리고 그 사이에 애를 낳는 등 타락한 생활을 3년간이나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 신부를 만나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사를 받은 후로는 첩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자신이 낳은 자식들의 부양비를 책임질 것도 약속하였다. 방탕했던 과거를 속죄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신공을 바쳤고 추운 겨울 동안에는 냉방에서 지내고 널빤지 위에서 잤다. 그래서 결국 치질까지 생겼다. 그의 이렇듯 속죄하는 것을 보고 교우들이 경탄해마지 않았다.
또 베드로는 친구들에게 늘 이런 말을 하였다.『지난날 이렇게 행동한 내가 천당에 가려면 치명하는 길밖에 없다』베드로는 김 신부가 잡힌 지 4일 후 남대문 밖 자기 집에서 잡혔다. 잡히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피하지 않고 집에 남아 있었다.
잡히기 전날 그의 딸 데레사가 마침 친정엘 찾아가게 되었는데 즉시 돌아가라고 재촉하므로 영문 모르고 그날 저녁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 포졸이 베드로의 집을 습격했다.
포졸이 베드로를 체포하자 아내가 그의 옷소매를 붙잡고『나는어떻게 살란 말이오』하며 눈물로 애원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이젠 끝장이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소』하고 아내를 뿌리쳤다. 포졸이 베드로를 붙잡아 좌포도청에 가두었다. 다음날 포졸이 다시 와서 그의 모친과 아내도 잡아가는 동시에 집과 가산을 몰수하였다.
베드로의 외인 형제 중 하나가 포청에 자주 드나들며 음식을 들여보냈으나 베드로는 옥에서 주는 음식으로 충분하다고 하며 음식을 거절하였다. 옷도 들여보냈는데 이때도 그는『내가 입고 있는 것도 과분하다. 옷을 더 가져 오지 말라』고 하며 옷가지도 거절하는 것이었다. 사실 베드로는 동기를 만남으로 인하여 마음이 허약해질 것이 두려웠으므로 방문 오기를 금하였고 또 방문 왔을 때에도 만나주지를 않았다.
한 번은 문초 중에 베드로가 허리에 띤 군인 명찰을 포장에게 주며 말했다.『나는 오늘까지 천주의 조물로 살아왔고 또한 국록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젠 죽음이 남아 있을 따름이어서 이 군인 명찰을 나라에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루는 군인 친구 30여명이 포청으로 몰려와서 베드로에게 배교를 권해 보았지만 베드로는 그들의 말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친구들이 이상히 여겨『저렇게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 천주교리에 그렇게 심취할 줄은 몰랐다. 석방시키고 싶지만 죽기로 맹세하였으니 어찌 할 도리가 없다』고 말하고 물러갔다. 치도곤을 수없이 맞았다. 형리가 곤장으로 어찌나 혹독하게 쳤던지 팔병이 날 정도였다. 마침내 교살되어 순교를 달성하니 나이 51세였다. 달례에는 40세로 되어 있으나 51세로 보는 딸의 증언이 보다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한리향 노렌조는 원래 덕산의 양반 출신으로서 결혼 후 양지 은이마을로 이사 와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년 시절에 입교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교우 여자와의 결혼이 그의 개종의 동기가 된 듯하다. 그 후 범 주교가 그를 은이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한 노렌조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존심이 남달리 뛰어나 있었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을 집으로까지 데리고 와서 대접하기도 했다. 이웃의 한 과부가 기해년의 기근으로 인하여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끼니를 굶고 있는 딱한 사정을 보고 노렌조는 식사 때마다 한 공기의 밥과 국을 보내주기를 일 년 이상이나 계속했다고 한다. 김 신부가 체포되었을 때 이 도마를 김 신부의 집 주인으로 의심하고 포졸들이 이 도마를 붙잡고 조카의 피신처를 대라고 재촉하므로 그는 포졸들을 은이마을로 인도하게 되었다.
음력 7월 비 나리던 어느날 서울에서 포졸이 온다는 소식에 모두가 산 너머 터골로 피신하였고 노렌조만이 남아 있다가 붙잡혔다. 포졸들은 노렌조의 옷을 벗기고 대들보에 거꾸로 매달고는 잔인하게 매질했다. 서울로 압송되어 포청에서 9월 20일 남 베드로 등과 한 가지로 교수 치명하니 나이 48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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