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도시에 살다보면 같은 여름이라도 시골보다 더 덥게 느껴진다.
자동차가 밀어닥치는 거리、사람들이 붐비고 웅성대는 고층 건물 화끈거리는 아스팔트 이런 서울의 여름은 짜증스럽기만 하다.
소년 시절의 한때를 보낸 시골 여름은 퍽 시원했다고 기억된다.
낮일이 약간 한가한 틈을 타서 사람들은 대개 귀틀집 같이 얽어놓은 원두막 위 소슬바람 속에서 낮잠을 잔다든지 또는 백 년이나 해묵은 느티나무 아래 집채만 한 그늘에서 장기를 두기도 한다.
저녁이 되면 대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는 방구석에서 빠져나와 마당 한복판에 멍석을 깔고 삶은 옥수수를 뜯으면서 이야기를 오손도손 나눈다.
그럴 때면 으레 피워놓은 모닥불을 후후 불어 시뿌연 연기를 일으키곤 하는 일은 각별히 인상적이었다.
시골의 무더운 여름밤은 장딴지나 어깨죽지를 철석철석 쳐가며 모기를 쫓는 가운데 그렇게 식어가는 것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도시의 여름은 다르다. 샐러리맨은 일과 후 친구 한둘과 어울려 냉방이 썩 잘된 맥주집에서 마른 안주나 씹으면서 하얀 거품의 맥주잔을 기울이면서 초저녁의 열기를 식히려는 것이다.
혹은 더 서민적인 이런 피서의 광경도 있다.
시장 어귀 뒷골목의 가게들 앞에 흔히 나무 판자로 만든 긴 의자 위에 두 사람이 마주 걸터앉아 장기를 두면 다른 한두 사람은 옆에서 훈수 두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시 사람들은 바닷가로 찾아가는 것을 흔히 피서라 하지만 공연히 더위를 피하기는커녕 구름떼 같은 사람들 속에 파묻히게 되니 그런 고생도 질색이다.
해변이 붐비는 공중 목욕탕 같은 느낌이고 일용품마다 바가지값을 씌우려 드니 바다로 피서간다는 것은 헛된 말뿐이지 결국 신경이 곤두서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저 마음 편하고 돈 안 들이는 피서법이란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후 방바닥에 깐 돗자리 위에 벌렁 누워 운동 경기를 TV로 구경하는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경기는 수준 높은 내용이라야 더욱 시원하다.
그렇게 본다면 며칠 전의 4개국 친선 쥬니어 여자 배구 경기는 참 시원스런 구경이었다.
한국팀은 최종일 경기에서 안정된 수비와 기교 있는 공격으로 일본팀을 완승하였다.
우리나라의 소녀들은 아직 애띤 모습과 청순한 몸매를 지녔으면서도 매우 성숙한 경기 운영을 하였다.
재치 있는 토스 대각선으로 허점을 찌르는 공격、정확한 속공-이런 식으로 일본팀을 압도하였다.
특히 비교적 단신의 김애희의 절묘한 토스는 하나의 예술과 같았다.
실력 있고 자신이 넘치는 일처리란 이렇게 항상 보는 사람의 가슴을 후련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그러나 저러나 8월이 가까 이오면 무더위마저 잊게 하는 민족적 회상이 있다.
1954년 8월 15일-해방의 기쁨、그해는 몹시 더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성을 올렸다.
해방은 실로 갈라진 땅을 적셔주는 소나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우리 민족은 수많은 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해방이 갖다준 정치적 발전은 큰 의의가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
최근에 국회에서 채택된「시국에 관한 건의안」은 소나기까지는 되지 않는다 해도 비지땀을 들어가게 하는 시원한 바람에나 비유할 수 있을까. 거기에 의하면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반을 강화하고 국민적 대화의 광장을 넓히기 위해 국회의 활성화가 긴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긴급조치 해제와 구속자의 석방 등이 건의되었는데 이 건의안은 한마디로 국민에 의한、국민을 위한、국민의 단결을 굳게 다짐하려는 정치적 발전이다.
최근까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모두 1백71명으로 그 내용은 학생 73 성직자 21 정치인 12 언론인 3 일반인 29 근로자 1 군인 5 교수 1 문인 1 기타 24로 구분된다.
건의안은 이들의 석방을 제의하고 있는 것이다.
여야가 오랜만에 합의해 이루어진 이러한 대정부 건의안은 국민의 단합을 위해 매우 고무적인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건의안의 채택에 앞서 장관의 국회 답변에서는 재임용에서 탈락된 교수들에 대해서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쨌든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반 강화 국민적 대화의 광장 확대、긴급조치 해제 및 구속자의 석방 등에 관한 건의안은 무더위를 잊게 하는 시원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올해 여름은 방바닥에 깔아놓은 돗자리 위에 뒹굴면서 이러저런 시원한 뉴스들이 터져나오기를 바랄 수 있을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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