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주고 행동도 주는 쪽이 더욱 바람직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행동보다 더 우위에서 주어지는 것은 정신입니다. 때로는 말만 줄 수도 있고 또 몸만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랑의 싸움、즉 정신이 주어지지 아니하면 결코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어떻게 떨어져 있을 수 있느냐고 할런지 모르지만 분명히 몸만 주고 정신은 안 주는 경우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초상집의 문상객은 물질을 주고 몸을 주고 행동을 주지만 정신은 안 주고 있는 수가 허다히 있지요.
사랑 없는 교사가 생도를 가르친답시고 교실에만 있으면 사랑한다고 또 생도에게 무얼 준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정신을 주지 못하는 교사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도 교육도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일종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행위에는 물질보다도 오히려 정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정신을 주는 것이 말을 주고 행동의 표현으로써 물질이나 몸을 주는 것보다 우위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의 행위에서도 이것은 타당하는 것입니다.
말을 주고 몸을 주고 정신을 주면 비로소 온전히 주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은 사랑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하고 그 첫째 단계는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 애착을 느끼는 것이라고 합니다. 애착이란 동정하는 것 아끼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사랑한다 함은 아낀다 함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기에 한문자 사랑 애(愛)자는 아낄 애라고 읽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우정의 단계입니다. 격의 없이 소통이 가능한 단계라고 보겠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에 우정은 애착의 단계 위에 있게 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헌신의 단계입니다. 헌신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최고의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사랑의 고귀성을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헌신 이외 사랑의 더 높은 단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헌신의 단계에서는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사랑한다 함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눈이 예쁘니까 사랑한다 함은 눈을 사랑하는 것이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니까 진실한 의미에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옛날이야기이지만 오히려 헌신적 희생적 사랑의 좋은 보기입니다.
옛날 신라시대 제38대 원성왕 때의 일입니다. 해마다 2월이 되면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서울의 남자와 여자가 흥륜사전탑(興輪寺塼塔)을 다투어 돌았는데 이를 복회(福會)라고 했습니다. 그때 김현(金現)이란 사람이 홀로 매일 밤 밤이 깊도록 탑을 돌면서 소원성취를 빌었습니다.
어느날 밤 자기 앞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 같은 보조로 탑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김현은 그 처녀를 꽉 껴안았습니다. 그 처녀는 범이 둔갑을 한 처녀인 줄을 김현이 알 턱이 없었습니다.
김현은 처녀를 따라 그들 소굴로 갔습니다. 그 처녀에게는 세 오빠 호랑이가 있었는데 그날 밤 세 오빠는 사람 냄새를 맡고 시장기를 돋구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너희들이 생명을 즐겨 해침이 너무 심하도다. 마땅히 한 놈을 죽여서 악을 징계하리라』하니 세 짐승은 서로 근심에 쌓였습니다. 처녀는 말했습니다.『세분 오빠가 멀리 피해가서 스스로 근신하겠다면 제가 그 벌을 대신 받겠어요』하였습니다. 처녀는 김현이 숨어있는 곳에 와서 다시 말했습니다.
『저와 낭군은 비록 동류가 아니지만 하루 저녁의 즐거움을 같이 했으니 부부의 의를 맺은 것입니다. 이제 세 오빠의 악은 하늘이 이미 미워하시니 우리 집안의 재앙을 제가 혼자 당하여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서 은덕을 갚는 것과 같겠습니까? 제가 내일 성 안에 들어가 사람들을 몹시 해치면 나라 사람이 저를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므로 임금께서 반드시 높은 벼슬로써 사람을 모집하여 저를 잡게 할 것입니다. 그때 낭군은 겁내지 말고 나를 쫒아 성북 쪽의 숲속까지 오시면 나는 낭군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고 하고『나의 죽음은 천명이요、또 나의 소원이요、낭군의 경사요、우리 일족의 복이요、국민의 기쁨이다.
한 몸 죽음에 다섯 가지 이로움이 있거늘 어찌 듣지 않으리요』하고 하룻밤의 낭군을 위해 자기의 전부를 희생했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아마도 그 당시의 여인들에게 교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거니와 사랑이 헌신과 희생을 요청하는 좋은 예인 것입니다. 하기야 춘향의 이도령에의 헌신이나 또는 심청이의 살신적인 효도가 다 사랑의 최고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사랑의 최고 형식은 살신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살신적이라 함은 전부를 준다는 뜻입니다.『내 몸을 당신께 바칩니다』고 하는 단계의 사랑! 그 이상의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식을 위하여 인생을 바친 부모가 있고 제자를 위해 일생을 바친 스승이 있고 남편을 위해 혹은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남선녀가 있습니다. 부모를 위해 형제를 위해 동포를 위해 그리고 인류를 위해、목숨을 바치며 자유를 위해 정의를 위해 진리를 위해、평화를 위해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사랑이 있다면 이 세상은 외롭지 않습니다. 불행하지 않습니다. 절망이 아닙니다.
준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줄 것은 없어도 사랑은 한다』함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유산이 없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질만 가지고 줄거리로 생각하니 그렇게 표현되지만 주는 것이 어찌 물질적인 것만이 있겠습니까? 보다 큰 사랑은 물질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앞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정신의 사랑은 고귀한 것입니다. 정신의 사랑이 무형적이라서 고귀한 것이 아니라 물질을 초월하여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령 물질적인 사랑이 물질로만 주는 것이라면 정신적인 사랑은 그 물질에 정신을 부가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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