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온돌방이 여름에는 냉돌방으로 변한다. 바깥이 제 아무리 뜨거워도 온돌에는 그리 큰 영향을 주지 않아 나는 꼼짝 않고 누워 잡지를 뒤적거리며 긴 여름철 낮을 보낸다. 피곤하면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진다. 그간 애들의 성화에 못 이겨 또는 가장으로서의 체면을 위해 웬만한 피서지를 다 드나들었지만 돈은 돈대로 쓰면서도 늘 화만 내다 돌아왔다. 교통편도 그렇고 숙박시설도 선전과는 달리 손님들에게 불편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해주기 위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도 피서지의 더럽고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줄곧 짜증만 낸다.
그리하여 피서지의 낯선 방에 누워서 강아지들이 지키고 있는 텅 빈 서울집만 생각한다.
보통 때 그렇게 건강했던 애들이 피서지에 가면 탈이 난다. 10년 전에 경포대에 갔을 때는 도착 즉시 둘째딸이 앓기시작해 강릉 시내의 병원에서 피서를 하다 돌아왔다.
작년에는 문무왕의 수중능이 있는 바닷가에 갔었는데 막내딸이 앓아, 나는 딸을 데리고 감포 쪽의 병원을 왕래하다 돌아왔다. 그러니 거친 시골길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서 피서를 간 셈이 된다. 금년 여름 더위는 굉장하다. 주위에서는 벌써부터 어디로 피서를 가는가 하며 인삿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에게는 그런 인삿말이 금년에는 어디로 고생하러 가는가 하는 물음처럼 들린다.
다행히(?) 이번 중학에 들어간 아들이 보이ㆍ스카우트 훈련차 일주일쯤 무주 쪽으로 간다고 하기에 마음이 놓인다. 나는 애들이 자기네끼리 피서 가는 것을 반대해왔다.
가족 전원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며 오래 고집을 부리다보니 애들도 그런가보다 하고 순응하게 되었다.
가족 하나가 없어지니 금년에는 피서를 취소한다고 선언을 할려고 하는데 나머지 애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려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아내의 협조가 절대 필요한데 아내는 오히려 애들 편에 서서 부채질을 한다.
옛날에는 여름이 되어도 그렇게 심한 엄살을 부리지 않았고 더군다나 피서니 뭐니 하는 사치스런 얘기를 안 하고도 살았는데 요새는 모두 간사하게 되어 조금만 더워도 더워서 못 살겠다는 극한적인 엄살을 부리고 으례 피서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중요한 일을 대개의 경우 여름방학 동안에 해낸다. 책을 쓰고 작품을 손질하고 논문을 작성하기에 여름방학처럼 알맞은 기간은 없다. 이처럼 여름방학은 나에게 중요하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 일주일 또는 10일쯤 집을 떠난다는 것이 나로서는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산이나 바닷가에 가도 우리집만큼 시원한 데가 없다.
피서지에 가도, 머리 속에서는 늘 할 일이 맴돈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뒤적거리다 밖에 나가 개들과 놀다가 느즈막하게 아침과 점심을 겸한 밥을 먹고 시원한 냉돌방에서 일을 시작한다. 피곤을 느끼면 방바닥에 누워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며 잡지를 본다. 이것을 요즘은 빈대떡 굽기라고 하는 모양이다.
저녁이 되면 샤워나 하고 맥주를 한 병 들고 TV나 보다가 방에 돌아와 원고를 극적거린다.
나에게는 이러한 여름 생활이 가장 알맞는 피서법이다.
제삼자가 보면 게으름뱅이 같은 생활 같지만, 피서란 따지고 보면 게으름을 부리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이상적인 피서법은 나 개인에게 알맞은 피서일 뿐 나의 가족 각 개인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모양이다.
애들은 내가 들으라는 듯 덥다는 말을 연발하며 누가 어디에 피서를 가더라는 말을 한다.
이들의 애걸과 협박을 단호히 물리치고 내 주장대로 한다면 좋은 것 같지만 가장의 독재에도 한계가 있는 듯 결국 금년 여름에도 별 도리가 없다는 체념을 하고 있다.
싸늘한 온돌방에 길게 엎드려 이 글을 쓰면서도 머리는 피서에 쓸 돈과 장소를 생각하노라 바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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