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임이 데레사는 서울 관우물골에서 1811년에 출생하였다. 원래 부모가 교우였으므로 데레사는 어렸을 적부터 열심히 수계하였다.
데레사는 무엇보다도 성인들의 전기를 읽기를 좋아했고 그들의 덕행과 모범을 열심히 본받으려 했다. 그리고 교우 집에 초상이 나면 가서 연도를 해줄 뿐더러 여교우일 경우에는 도무지 꺼리지 않고 손수 장사 지냈다.
데레사는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딸이 결혼하지 않으려는 것을 이상히 여기고 결혼하도록 재촉하는 것이었다. 부득이 집을 뛰쳐나와 궁궐로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정식 궁녀가 아니고 재봉사로 일할 뿐이었다. 3년 후에는 궁에서 나와 얼마동안 이모집에서 지냈다. 그 후 오발바라의 집으로 가서 그를 돌보며 함께 살았다.
왜냐하면 오발바라의 양자 이문우가 잡히기 전에 데레사더러 그의 양모를 돌보아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었기 때문이다. 1845년 김대건 부제가 일시 귀국하여 돌우물골에 거처를 정하게 되자 데레사는 이 집으로 들어가 가정부로서 김 신부가 잡힐 때까지 봉사하였다. 한 번은 데레사가 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만약 신부님이 박해를 당하게 되면 나도 신부님을 따르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자헌하게 될는지도 모르지만 상관 없어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까』
1846년 봄 김 신부가 잡힌 후 데레사는 현갸오로가 마련한 새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어 급습하여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때는 윤 5월 16일 오후 4시경이었다.
잡히기 전날 데레사는 동생 가타리나의 집에 갔었다. 동생이 자고 가라고 붙들었지만 데레사는『현갸오로와 다른 교우들이 오늘 밤 새 집에 모여 일을 의논하게 되어 있으니 꼭 돌아가야 한다』고 하며 떠나버렸다. 사실 데레사는 잡히리라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함께 잡혀온 네 명의 여교우 중에서 데레사가 가장 용맹하였다. 데레사는 동료들 사이에 어떤 분쟁이 일어나면 좋은 말로 화해시키려고 노력하였고 동료들을 수시로 권면하여 그들이 고통을 이겨내도록 힘을 북돋아 주었고 그리고 형벌을 참아내지 못하던 이아가다가 데레사의 권고를 듣고 비로소 끝까지 형벌을 참고 이겨내게 되었다.
옥에 있은 지 70일 만인 9월 20일에 다른 동료들과 한 가지로 옥에서 교살되어 동정과 순교의 2중의 승리를 차지하였다. 때에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의 친척과 교우들이 수구문 밖에서 그의 시체를 찾아 그 근처에 매장하였다.
정철염 가타리나는 일명「덕이」라고도 불렸다. 수원의 교구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천성이 온순하고 순박한데다 총명하기도 비범하였다.
바라서 포천지방 영평에 사는 한 양반 김씨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는데 원래 주인이 외인이어서 가타리나에게 미신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첩으로 삼으려 하므로 가타리나는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어서 서울로 도망쳐 왔다. 서울에 와서는 우선 주자꼴의 남이관의 집에 붙여 살았고 그 후 화개동(오늘의 화동)의 김데레사 집으로 이사하여 데레사와 같이 살았다.
김데레사의 동생 가타리나는 언니 집에서 정가타리나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고 하며 그때 보고 들은 것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30세 가량의 아직 결혼하지 않은 동정녀였다. 모친은 열심한 교우였다. 시골에서 나서 시골 양반집의 하인으로 들어갔는데 주인 과부가 가타리나에게 미신 행위를 명하고 배교까지 강요하였다. 그러나 가타리나가 조금도 복종하려 하지 않자 주인 과부는 수없이 그에게 매질을 하고 불로 지지는 등 온갖 학대를 가했다. 그래서 서울로 피신해 왔다』
1845년 김데레사가 돌우물골 김 부제 집의 가정부로 들어가게 되자 그를 따라 김 신부 집에 와서 하인 노릇을 하며 수계하는 데도 충실하였다. 가타리나는 본시 허약한 건강에 몸에는 시골에 있을 때 주인으로부터 매 맞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의 몸은 부어 있었고 얼굴을 황색이었다. 요컨대 온 몸이 성치 않아서 힘든 일을 거의할 수 없었다. 김데레사를 따라 현 회장이 새로 마련한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데레사와 함께 잡혀 포청으로 끌려갔다.
또한 포청에서 데레사와 같은 날 교살됨으로써 순교와 동정의 월계관을 차지하였다. 나이는 30세였고 수구문 밖에 버려진 시체를 교우들이 거두어 이웃에 매장하였다.
이렇게 영광스런 최후에도 불구하고 가타리나의 일생에는 하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즉 그는 체포되기 전까지 현갸오로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전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교우들 중에서도 알고 있는 이가 매우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동거생활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현갸오로의 첩이었다고도 하며 내연의 처였을 것이라고도 하는데 가타리나가 여종의 신분에 불과했으므로 내연의 부부로 보는 것이 훨씬 그럴싸 할 것 같다. 어쨌든 그들은 둘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용감히 목숨을 바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뿐더러 극히 소수에게만 허락하는 순교의 탁월한 은총까지 받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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