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영어 교사이던 아빠가 돌아가시자 우리집은 하루 아침에 가난뱅이가 되었다. 엄마는 우리 두 자매를 위하여 품팔이를 시작하셨고 근근이 죽을 먹으면서도 나를 현 경남국민학교에 입학을 시켜주셨다.
비록 돈은 없지만 우리 식구는 화목하게 열심히 살아갔다. 그러나 엄마가 사고를 당하셨다. 잠깐 실수로 말미암아 방아간 기계에 팔을 짤리신 것이다.
엄마의 실수이기 때문에 손해배상도 받을 수가 없었다. 불구자가 된 엄마…그때의 내 나이 열 살 동생의 나이 일곱 살, 나는 우리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남의 집 애기도 봐 주고 청소도 해 주면서 연명을 해 나갔다. 지금까지 학교는 즐거운 배움터였지만 그 후로는 우울하고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다. 빗발 같은 사친회비 독촉을 받아가며 간신히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엄마가 동생들의 생계를 위해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턱대고 도시로 뛰어나왔다. 눈에 띄는대로 음식점이나 다과점에 들어가 일을 시켜 달라고 졸랐다. 모두들 어려서 안 된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나는 열다섯 살이라고 속이고 식당 주방에서 천덕꾸러기 보이 노릇을 했다. 설거지며 청소, 심지어 빨래까지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래도 굶주렸던 배를 채울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웠던지. 오직 하나의 희망은 월급이었다. 그러나 오늘이나 줄까 줄까하고 기다렸지만 월급을 줄 생각도 아니 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먹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돈이 없으면 시골에 있는 엄마와 동생은 어떻게 살란 말인가. 나는 부끄럼을 무릅쓰고 구두닦이로 나섰다.
주인 아저씨가 주신 5백 원으로 사과 궤짝을 사서 구두통을 만들었다. 구두 닦는 헝겊이며 약도 준비했다. 다음날 옥다실 앞으로 가서 구두 닦는 애들의 손을 열심히 관찰했다. 솔로 먼지를 털고 약을 바르고 줄로 문지른 다음 모기장 같은 헝겊으로 문질러 광을 내기도 하고 헌 걸레 같은 것에 약칠을 해 가지고 침을 뱉으며 문지르니까 광이 기가 막히게 난다.
나는 구두닦이 소년들이 일러준 대로 등록증을 내기 위하여 파출소로 갔다.
『아니 여자 아이가 어떻게 구두닦이 노릇을 한단 말이냐!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다고…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다 좀 더 크면 시집이나 가거라』
『시집 갈 때가 되면 가지 말래도 가겠으니 어서 등록증이나 해 주시지요』
당돌한 내 대답에 순경 아저씨들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내게 등록증을 내어 주셨다. 그리고 매일 아침 와서 순경 아저씨의 구두를 먼저 닦도록 배려까지 해 주시면서 격려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다시 한 번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나를 용감한 여자 아이라고 칭찬해 주시겠지. 허지만 엄마나 동생이 까맣게 더럽혀진 두 팔뚝을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첫날 수사 계장님의 구두를 닦아드렸더니 빳빳한 백 원짜리를 주신다. 거슬러 드렸더니 개업을 축하하는 뜻에서 특별 서비스라고 받지 않으셨다. 나는 동정을 받는 것 같아서 사양했지만 아저씨의 마음이 고마워서 인사를 드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 넣었다.
『열심히 열심히 일해 보겠어요!』
첫날은 오백 원을 벌었다. 집에 돌아와 식당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더니 모두들「슈산걸」이라고 부르며 놀리기만 했다.
『돈이라면 별 짓을 다 하는군』
어느 종업원의 말.
『흥 이제 말세야 말세. 여자가 구두닦이 노릇까지 하다니』
지나가는 행인의 가시 돋힌 말! 거기에 깡패들의 행패가 시작되었다. 구두통이 발길에 채여 날라가고 솔과 약이 흩어졌다. 누구 하나 말리려는 사람조차 없었다. 모두들 좋은 구경거리인 듯 웃으면서 바라봤다. 다행히 지나가던 파출소 순경 아저씨의 눈에 띄어 위기를 모면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아침은 십 원짜리 수제비로 요기하고 한 나절을 금남로 골목 안을 외치고 돌아다녔다. 광주극장 건너편에서 겪은 남자 구두닦이들의 야유와 욕설-.
나는 피로에 지쳐 실망했다. 눈 앞이 캄캄한 채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세웠다. 첫닭 울음소리가 없는 광주의 고요한 적막을 헤치고 통금 해제 사이렌 소리가 길게 퍼져간다.
『아핫! 신문 배달』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막힌 생각 나는 신문 보급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학생이라야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사정을 얘기하고 하루 종일 졸랐다. 드디어 나는 구두닦이에 신문 배달원까지 되었다.
「인명은 재천이다」설마 죽기야 할라고 열심히 뛰었다.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여학생을 볼 때 가슴이 찟어질 듯 아파온다. 배 고픈 설움 집 없는 설움, 부모 없는 설움, 거기에 못 배운 설움이 나를 짓누른다.
그동안 입지 않고 먹지 않고 모은 돈 10만 원 중에서 변두리 전셋방을 삼만 원에 얻었다. 나에게도 따뜻한 안식처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동양학원 중등과 야간부에 입학을 했다. 하얀 새 교복, 눈물이 나왔다. 학원에 다니면서 구두닦이를 그만두었다. 대신 해태껌 대리점으로 뛰어가 시중에서 십 원 하는 것을 칠 원에 떼었다. 문방구에서 볼펜을 구입해서 아무 합승이나 올라탔다. 선전을 하자니 목이 콱 메어 말이 안 나왔다.
『복잡한 차 중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전쟁터의 군인처럼 용기를 내어 소리를 높였다. 똘만이들의 짓궂은 시달림. 나는 견디어냈다. 이 년 동안의 학원 생활을 끝마치고 검정고시에 두 번이나 합격하여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고 5급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했다. 지금은 엄마와 동생과 함께 이십만 원짜리 전셋방에서 단란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예전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경리사원, 나는 모회사의 경리사원이 되어 열심히 일하고 있다.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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