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우리 본당에는 6개의 공소가 있었는데 N공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도변에 있어서 신부님께서 찝차를 운전해서 가시기엔 여간 편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공소에 미사가 있을 때는 고물 찝차를 몰고 갔었다.
그런게 각 공소의 신자들은 새로 부임하신 본당 신부님의 첫 번째 공소 방문이라 모두들 기대가 컸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공소에 미사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공소에서는 바쁜 농번기 철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소에 나왔다. 우리들이 처음 방문한 곳은 D공소였다. 그래도 이 공소는 본당에서 가까울 뿐 아니라 그동안 공소 신자들의 영신적 사정이 별로 흐트러지지 않았다. 특별히 작달막한 공소 회장님은 구교우 집안이라 개인의 신앙생활도 철두철미했지만 교우들의 지도에 있어서도 열성적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방문할 H공소에 도착할 시간은 찝차의 고장 관계로 두 시간이나 넘었다. 이제 해가 저물어 완전히 주위가 깜깜해졌다.
우리들이 바삐 미사 짐을 챙겨서 공소에 도착하니 기다리다가 지친 교우들이 왁자지껄하고 공소 마당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물론 교우들은 그때까지 저녁식사도 않고 몇 시간 동안이나 신부님을 기다렸던 것이다. 신부님이 늦어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하면서 미사 준비를 위해서 우선 공소 사택으로 가시자 많은 여교우들이 뒤따라왔다. 그러나 조금 있으니까 술이 얼큰히 취한 공소 회장과 몇몇 청년들이 비틀거리면서 들어와서 신부님께 늦은 이유를 따지며 대드는 것이다.
그들은 신부님을 기다리다 지쳐서 앞의 주막집에서 술을 몇 잔씩 마셨던 모양이다. 나는 가로막고 서서 그들을 말렸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나중에는 신부님께 횡설수설 덤벼들었다.『신부만 어디 제일인가? 늦은 이유를 말하시오』『흥, 이제 우리들은 신부도 믿을 수 없단다는 것을 알았소.』
이 H공소는 우리 본당의 공소 중에서 N공소와 함께 가장 오래되고 구교우도 많으며 전통 있고 신자도 많다. 특히 공소 회장의 집안은 옛날 안 주교님 재직시부터 주교님을 도와서 전교활동을 하던 집안이라 신앙에 대해서는 깊은 뿌리가 있는 구교우 집안이다.
그러나 현재의 공소 회장은 부친과 달리 성질이 괄괄하고 막걸리 잘하는 육군 대위 출신이다.
잠시 동안 신부님은 기각 막힌 듯 잠잠히 앉아계셨다. 그러나 다음 순간 조금도 화를 내지 않는 얼굴빛으로 씩 웃으시면서 그들에게 담배를 권했다. 그리고 공소에서 준비해둔 술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물론 그때 형편으로 미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술이 들어오자 신부님께서 손수 수단 자락을 걷어부치고 교우들에게 술을 권했다. 술이 몇 잔씩 들어가자 교우들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탁 트였다. 나중에는 저절로 웃음꽃이 피고 여교우들은 좋아라고 덩실덩실 춤을 출 지경이었다. 그리고 예의 그 청년들도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몰라했다. 그들은 이제 신부님의 너그럽고 인자하신 마음에 완전히 감동되어 이튿날 아침 미사 전에 자기들의 무례함을 다시 한 번 사죄하고 고백성사를 보고 미사를 드렸다.
그 후부터 신부님은 다른 어느 공소보다 이 H공소를 더 사랑하셨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교우들은 무슨 의논할 일이 생기면 꼭 P 신부님을 찾아가서 상의를 하고 지도를 청하고 있다.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