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간상이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좋은 비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유치원 아이들한테 장차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너도 나도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되겠다고 합니다.
국민학교 졸업반 아이는 사장이 되겠다고 하고, 고교 졸업반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라고 하고, 대학 졸업반은 ○○회사의 사원이 되는 것이랍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그 목적하는 바가 커가면서 낮아지는 것입니까?
(분명히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는 잘못된 목적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있어서 국무총리는 너무도 추상적입니다.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적은 이상(理想)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이상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고 이상이란 측면에서 볼 때는 그것이 반드시 현실과 가까운 것도 아니지요.
플라톤이나 페스탈로치 같은 사람이 주장하는 이상적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한 인간의 희망 속에 잠재하는 이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희망이 없었다면 또 그러한 이상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혼미하고 어수선하여졌을 것입니다. 사람은 빵만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누구의 문제인데 교육은 누가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교육은 교사가 하는 것이며 교사에 관한 논의를 교사론(敎師論)이라 합니다만 여기서는 교사의 근본되는 문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흔히 교사라 하면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자를 일컫는 말입니다마는 교육이 비단 직업적 교사에 의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보다 넓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다음의 몇 가지 조건들을 다 갖추었을 때 또는 그 중에 몇 가지 또는 한 가지라도 성실히 행해질 때 교사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릇 교사는 정열이 있어야 합니다. 헤겔이라는 철학자는 이 세상의 위대한 모든 일이 정열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만큼 정열은 일을 성취하는 데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열 없이는 아무 일도 성취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육도 위대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모든 위대한 인물이 교육에 의하여 나타나니까 말입니다. 교육의 일도 정열에 의하여 수행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교육활동이 정열로 해서 성취의 결실을 맺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열은 젊음을 기본으로 하고 활동을 내용으로 합니다. 그러기에 정열은 활기찬 젊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학교의 어린이들은 자기의 담임 선생님이 젊은 것을 자랑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젊은 것보다는 그 교육활동이 젊은 것을 더욱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러기에 유치원의 보모는 더욱 젊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국민학교의 선생님도 중학교의 선생님도 젊어야 합니다. 왜 젊은 선생을 희망하는 것이겠습니까? 그 젊음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젊음에 기대하는 것은 정열입니다.
만약 정열 없는 젊음, 활기 없는 젊음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교육에서 기대하는 젊음은 아닌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교사로서 태어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교사의 자질이란 애매한 것입니다. 차라리 교육하고자 하는 정열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교육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의 정열이란 말 속에는 아동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피교육자에 대한 신뢰 없는 교유이란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인 것 밖에 될 것이 없습니다. 슈바이처와 같은 인간에의 신뢰, 페스탈로치와 같은 어린이에의 신뢰가 정열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정열은 활동을 수반하고 활동은 감동을 부르게 됩니다. 감동 없는 교화(敎化)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음으로 생각되어야 할 문제는 교육의 기본적 기능으로서 모범(模範)의 문제입니다. 언제 어디서 행하는 어떤 교육이든지 모범과 모방이라는 관계를 떠나서 교육을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즉 성인의 모범에 대한 미성인의 모방이 교육의 기본 작용인 것입니다.
나는 바담풍(風) 해도 너는 바람풍 해라는 식의 교육은 결코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가 교육하느냐의 문제에서 생각할 때의 이 문제의 범주는 모범의 문제에 제한된다고 보겠는데 교사의 모범이란 다른 의미에서는『나를 따르라』할 자신이 없다면 교육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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