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네스토리우스」라 불리는 「景敎」(경교)는 기독교의 일파이긴 하나 성모공경을 거부, 4백 35년 에페소공의회에서 파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경교」는 페르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산시켰고 6백 35년경에는 당나라에까지 전래되어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7백 50년 간 상당한 교세를 자랑하였다. 특히 1956년 경주에서 출토된바있는 석제십자가와 성모마리아상은 「경교」가 신라시대에 이미 이 땅에 전래된바 있음을 시사해주기도 했다. 본보는 지난 1년 동안 대만국립박물관 및 도서관을 비롯 대만전역을 돌며「경교」의 동방전래 역사를 연구, 자료를 수집한바 있는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통해 15세기 이전에 이미 동방에 온 「경교」-기독교의 발차취를 살피고 한국 땅에서의 경교의 흔적을 살펴본다.
■ 경교(景敎ㆍ네스토리우스파)
경교는 기독교의 일파로서 5세기 중엽에 콘스탄티노플의 총 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성모 공경을 거부하여 435년에 폐소 공의회에서 파문을 당하여 생겼다. 페르샤왕국이 동로마 제국과 적대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 교도들은 페르샤로 이주하여 페르샤 왕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 후에 회교도에게 박해받아 본산(本山)을 바그다드라는 곳으로 옮기어 세력을 크게 펴게 되었다. 이교의 특징은 ①성모공경 거부 ②우상 숭배 부인 ③경전 용어로 시리아어를 쓰는 것 이다. 경교는 그리스도 자체가 빛이라는 뜻에서 경교(景敎)라 하였다.
성직자들의 독신문제를 보면 주교 이상은 결혼할 수 없고 사제이하는 결혼할 수 있었다. 주교는 금육을 하고 소식만을 하였다. 일반 신자는 1년 중 152일간 금육을 하고 돼지고기를 금했다 한다.
경교의 조직은 로마교회처럼 총주교 부주교 사제가 있고 집사 부집사 교회관리인이 있었다. 미사 드릴 때 사제는 시리아어로 된 성경을 읽고 강론을 하였다 한다.
경교는 635년 당나라에 전래되어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750여년간 그 교세가 상당 하였다. 경교의 시리아어는 몽고와 만주 문자의 모체가 되었다.
■ 신라의 경교전래
일생을 동양의 기독교전래와 불교와 기독교 관계를 연구한 영국의 골든여사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대진경교류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모조품을 1917년 금강산 장안사 경내에 세우고 일본 고야산(高野山)에 세웠다.
골든여사는 경주 석굴암 안에 있는 전설 양 벽에 부각된 신상(神像)중 두상은 페르샤 무인상(武人像)과 같고 내벽에 부각된 십이면관음상(十二面觀音像) 십나한은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하였다.
이 밖에 통일신라시대 능묘제도의 특색이 되어 있는 호석(護石)에 부조된 십이지상이나 능묘 앞에 배치된 무인상 들이 모두 경교의 영향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정 토교와 대습 불교는 경교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1956년 경주에서 석제 십자가와 성모마리아상이 출토 되었다. 경교는 원래 상당한 정치성을 띄고 대도시부터 전교를 함으로 당시 수도인 경주에 첫 발을 들여 놓았을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당시 백제 고구려 포로 유민상당수가 당에 이주되었으며 노예의 신분은 아니었고 황하대운하구에서 운수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엄격한 골품제도를 벗어나 웅지를 품은 유학생 구도승 숙위(宿衛 질자)들이 당에 건너갔으며 당의 문화가 홍수처럼 밀려 들어왔다. 경교도 이때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교가 신라에 전래 되었다 해도 신라 출신의 방인사제를 키우지 못 했다면 당무종 경교 박해 때 전교사를 파견하지 못하여 일단 절적(絶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고려시대의 경교전래
요(遼)에서도 경교가 상당히 성행하여 옛 요의 영토에서 적지 않게 경교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고려초기부터 요와 영토를 접하고 고려 태조는 요를 야만시하여 10훈요 제4조에서 「거란은 금수(禽獸)의 나라」라고 규정하고 언어 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경고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요는 약 25년 동안에 항쟁을 통하여 인물 문물 교류가 적지않게 이루어졌다.
성종14년과 2년에 걸쳐 유학생 20여명이 요에 건너갔다. 거란 포로들이 수만에 이르렀다하며 그들이 천민으로 편속되어 집단 거주를 하며 공예에 능했다하니 이들 중에 상당수의 경교신자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고종 5년(1218)몽고의 군사가 강동성에서 거란병을 포위하면서부터 원의순제가 막북(漠北)으로 쫓겨 갈 때까지 150여년 간 고려와 몽고와의 관계가 계속 되었다. 이렇게 장구한 시일을 두고 인물 풍속 문물이 교류되었다. 고려의 항복을 받은 몽고는 일본정벌을 단행하기위하여 고려에 군수물자를 부담시켰는데 두 번 다 태풍으로 실패 하였다. 이때 한국을 거쳐간 몽고군이 수만에 달했는데 일본 후꾸오까겐에있는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몽고군의 군복과 병기에 십자가 문양이 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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