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지난 6월 서울 단국대에서 열린 제19회 전국 국어국문학 연구 발표대회에서 서울 대동상고의 하성래 교사가 연구 발표한「천주가사에 대하여」란 주제의 강의 내용으로 근세 초기의 서양사상 이입 경위를 다루고 있다.
19세기 한국 문학 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천주가사 곧 천주찬가의 출현이었다. 1779년(正祖 3)경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천주가사는 서양사상을 최초로 수용한 문자요 국문학 작품이었다. 그것은 유ㆍ불ㆍ선 3교를 배경으로 산출된 종래의 한국 문학에 비하면 분명히 이질적인 서양의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삼고 있으며 한국 문학 특히 시가문학에 있어서 주제면과 내용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곧 종래「신이 없는 한국의 문학」에 신의 사상을 부여하고「신이 있는 문학」으로 변모를 가져왔다.
일찌기 18세기 말엽(1779년)부터 싹 트기 시작한 천주 찬양의 천주가사는 피비린 박해에도 불구하고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이르도록 끈질기게 창작되었으며 천주교도들의 유일한 신앙 표백의 문학으로 성장하여 왔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는 민중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애송된 문학이었고 영혼의 고백이었고 신앙의 복음서였다.
이처럼 천주가사는 한국 문학에 있어 주제 내용면의 변화를 가져왔고 민중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애송되면서 또 한국인의 사상에 새로 이 신의 좌표를 설정해 주었고 평면적인 의식구조에 일체성을 부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한국의 문학사 및 한국의 문화사에서는 개신교가 들어온 이후의 기독교 문학에 관하여만 언급하고 있을 뿐 그 이전 가톨리시즘에 의하여 창작된 천주가사에 관하여는 별로 언급이 없었다. 그 까닭은 천주교가 도입된 이래 피비린 추해를 받으면서 밖으로 공공연하게 노출되지 못하고 땅 속에 묻혀버린 데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이후 천주가사는 창가 신체시를 거쳐 현대시에 이르기까지 한 줄기 연면한 맥락을 찾을 수 있는데 본 발표에서는 주로 천주가사의 발생 천주가사의 시대 구분 천주가사의 몇 가지 특성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二, 천주가사의 발생
①천주교의 도입=임란 이후 한국에는 북경 사신들에 의하여 천주교 서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는 허균(1558~1617)이었다.
㉠「許균到中國得基他圖及갈十二章而來」(어于野談) ㉡「光海時 許균購來七克篇」(눌암記略) ㉢「星湖赤営得見七克 星湖爲學엄博無書不讀어太西書 赤상涉臘之作색說 稱利마두日眞聖人也개取天文大地理之說」(上同書)
②천주가사의 효시=1779년(정조3ㆍ기해) 11월에 광주 기자산에 있는 천진암 주어사에서 권철신ㆍ정약전ㆍ이벽ㆍ권상학ㆍ이총억 등이 모여 천주교리연구회를 가진 뒤 정약전ㆍ권상학ㆍ이총억 등은「십계명가」를 짓고 이벽은「천주공경가」를 지음. 이것은 천주가사의 효시로서 이승훈이 북경에 들어가 영세를 받고 돌아온 1784년보다 5년이나 앞선다. (한국언문학 8ㆍ9집 참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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