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그 아주먼네 여기가 어딘데 꾸역꾸역 기어드느냐 말이오. 그러나 애라고 다치면 치료비 물어내라고 떼쓰지 말고 어서 나가요. 』
나는 갓난애를 들쳐 업은 채 전기 공사장의 감독에게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전기 공사가 이미 결정이 났습니까? 결정이 안 났으면 그 공사를 저에게 맡겨주세요』
감독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웃었다.『도대체 아주머니가 전기 기술자란 말이요? 뭐요?』
『아닙니다. 기술자는 따로 있습니다. 일은 틀림없이 성실히 해 드립니다』
그때 내 나이 서른둘 일자리를 잃은 남편을 대신해서 나는 전기 공사장마다 그런 식으로 찾아가 떼를 썼습니다. 정말 주제넘은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남편이 하던 전기공사 청부를 맡겠다고 발벗고 나선 저의 행동은 결국 가는 곳마다 조소거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사정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돈은 한 푼 없었고 그동안 식모살이부터 여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리 막된 일이라도 마다 않고 겪어왔던 터라 그런 일보다는 남편의 전기 청부일이 훨씬 조건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이 그 좋은 기술과 조건을 자기 스스로 포기한 데 대한 억울함을 나로서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남편의 실수에 따르는 공사 청부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봤고 그 방면에 여러 가지 지식을 얻게 되면서 자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세째 아이를 배고 찌는 무더위 속에서 절망적인 여름이 지나갈 무렵입니다. 그 숱한 조소와 낭비 끝에 드디어 한 사람의 신청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이웃에 사는 오재건이라는 건축 청부업자였습니다. 가옥 세 채의 견적을 뽑고 계약을 하던 그날 나는 어린애 같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몇 번이고 마음 속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정직하게 싸게 그리고 정확하게 계약 날짜까지 공사를 끝내서 나에게 이 기회를 베풀어준 세상 사람에게 아니 오재건씨에게 보답을 해야 한다고…
남편도 기뻐했습니다.
『여보 난 이미 신용이 떨어져 공사를 맡을 수 없는 입장 아니오. 나를 채용한다면 기꺼이 당신 기사 노릇을 하겠오』
나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일사 후퇴 당시 거진에서 폭격에 돌아가신 어머니 시체를 옆에 놓고 동생과 함께 당황해 하던 일, 그때 처음 남편이 제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대구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열아홉이었고 그이는 씩씩한 군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1955년 우린 결혼식을 올리고 부대 앞 단칸방에서 첫날밤을 보냈습니다. 첫닭의 울음 소리를 꿈결에 들으며 나는 어머니를 부르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나는 한 방울의 눈물조차 흘릴 겨를이 없이 아내 노릇 엄마 노릇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새 출발…
남편과 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성과는 예상 외로 컸고 오재건씨는 다른 업자에게 소개까지 해 주었습니다. 일은 잇달아 들어왔고 저는 결혼 후 8년 만에 처음으로 연탄과 쌀 걱정이 없는 두려움 없는 겨울을 맞아하게 되었습니다. 쌀과 땔감과 고추와 김장감을 마련할 수 있는 나는 이 땅 위에서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는 여자였습니다.
1968년 봄 오 년 동안 피나는 긴장과 노력 끝에 마침내 우리는 마포구 마포동 행길가에 네 평짜리 점포를 얻고 전업사 간판을 내걸게 되었습니다. 명색이 전업사 대표가 된 후에도 나는 계속 누런 작업복을 걸친 사환 일부터 온갖 일을 도맡아 하면서 밤 새워 공부를 했습니다.
기사 자격증을 얻어 상공부 허가를 맡기 위해서였습니다. 입은 채 쓰러져 자고 눈 뜨면 운임이 싼 차를 예약해 두었다 전선주를 실어 나르고 청계천에 가서 한 푼이라도 싼 물건을 골라서 사고, 십 리 이십 리 걸어다니며 업자들에게 청원을 하고 때로는 관청에 나가 없는 말재주를 다해 대표 면하게 허세도 부려야 하고 그야말로 산 넘으면 산이라더니 저의 전업사 운명은 고투의 연속이었습니다.
1970년 1월 이 길에 나선 지 만 7년 만에 상공부 전기공사업 면허 제893호를 손에 쥐었을 때는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혹 가다 실패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기도 당하고 잘못 판단하고 계약할 때도 있어 손해도 보았지만 그런 중에도 나는 전기가 없어 고생하는 가난한 마을을 위해 배선도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전압이 얕은 것을 구실 삼아 악덕 사기업자들이 동민들의 호주머니만 털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최저의 원가 공사비로 그 가난한 마을에 전기를 끌었습니다. 화장품 대신에 드라이바 건전지 뻰치 휴즈를 넣은 빽을 들고 거리를 서성거린 지 어언 팔 년. 이제 젊은 여자가 이상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된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지요. 우리 세 아이도 모두 자라 학교에 다니고 이제 전셋집에서 반듯한 양옥집으로 이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백만 원 공사에서 한 푼 건지지 못한 일이 있어도 이젠 놀라지 않습니다.
캄캄한 부락에 불이 환히 켜졌을 때처럼 이 사회가 모든 분야에 밝아지기기를 염하며 성실히 살아갈 뿐입니다. 이제 나는 당당한 여성 전업사 대표로 일하면서 아무리 작은 공사에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책임감과 의무감 속에 새로운 인생을 조금씩 배워 나가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