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남 대주교의 하루」를 알아보기 위해 안양「성라자로 마을」을 찾았다. 마을 입구에서 약 20분 걸어 몰압산 중턱에 이르면 우거진 수풀 속에 스레트 지붕의 창고 같은 집이 한가롭게 서 있다. 「몰압산장」이란 옥호가 붙은 이 집이 노 대주교가 기거하는 곳이다.
기자가 산장에 당도한 시각이 오후 3시, 천정에 빗물이 스며들어 얼룩진 거실은 문이 활짝 열린 채 텅 비어 있다. 노 대주교는 마을로 산책 나갔단다. 노 대주교는 신학교 시절부터의 습관대로 아침 5시에 기상한다.
6시30분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성당에서 1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한다. 성체조배는 1958년「로마」에 갔을 때 매일 성체조배를 하는 사제들의 모임에 가입한 이래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단다. 7시15분쯤 조반을 들고 신문을 읽거나 편지 정리를 하고 10시에 첫 산책을 나간다.
산책 코스는 골짜기 위쪽에 산재해 있는 라자로요양원과 골짜기 아래 의왕농장이 있는 자활촌까지 한 바퀴 도는 걸로 고정돼 있다. 아침 산책이 끝나면 11시30분 잠시 기도를 바친 후 12시에 중식을 들고 오후 2시까지 휴식 이어 경본을 보고 오후 3시에 두 번째 산책을 한다. 오후 5시쯤부턴 책을 읽다가 6시에 저녁식사를 하고 7시부터 9시까지 텔레비젼을 시청한 후 곧 취침한다.
이 같은 일과는 방문객이 있거나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변함이 없다.
노 대주교의 산책 시간은 곧「성ㆍ라자로 마을」의 주민들과 만나는 시간이다. 환자집을 찾아 위문을 하기도 하고 사는 형편을 알아보기도 한다. 때로는 주민들과 어울려 윷놀이도 하고 장기를 두기도 하며 막걸리를 함께 마시기도 한다. 노 대주교는 바로「성 라자도 마을」의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요 아버지이다.
노 대주교가「성 라자로 마을」에 온 지도 어언 9년 6개월이나 됐다. 「성 라자도 마을」은 질병과 가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족 친지들로부터도 버림받은 나환자들의 마을이다.
노 대주교는 1967년 3월 27일 서울대교구장직에서 은퇴하면서 외형상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마을을 자신의 여생을 보낼 장소로 선택했다.
그동안「성 라자로 마을」은 엄청나게 변했다. 특히 이경재 신부가 원장으로 부임한 이래 이 마을은「지상낙원」이라 할 만큼 성당ㆍ숙소ㆍ목욕탕ㆍ세탁소ㆍ식당 등등 현대식 시설들을 모두 갖추었고 이에 맞갖게 생활 환경도 꾸며졌다. 이 신부는 미국 카나다 일본 한국 정부 및 서울대교구로부터 도움의 손길들을 유치하여 이처럼 거창한 업적을 이룩했다.
라자로요양원의 건물들은 모두 숲속의 아담한 별장 같은데 노 대주교와 이 신부의 거처는 낡고 초라한 옛 건물 그대로여서 무척 대조적이다.
노 대주교는 이 신부가 외국에 나가거나 하면 주민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고 성사를 주는 등 이 신부의 사목과 역할을 대신한다. 서울대교구와 수원교구의 주교가 부재 중일 때도 견진성사를 대행한다. 은퇴 후 4년간은 청주교구의 견진성사를 도맡아 집전하기도 했다.『은퇴한 주교이고 책임도 없지만』노 대주교의 사목생활은 계속되고 있다 할까. 은퇴로 인한 자유로움 때문에 노 대주교는 교구장 시절에 응해 주지 못했던 혼배미사 청탁을 자주 받아들인다. 그리고『25년간이나 서울교구 주교로 재직한 탓으로』정부와 사회단체에서 큰 행사가 있으면 초청장을 보내온다.
그런 때는『천주교를 일반에게 알리는 기회가 되니까』언제든지 참석한단다. 노 대주교는 1주일에 두세 번은 서울에 다녀가게 된다.
「성 라자도 마을」, 몰압산장을 찾는 방문객도 적지 않다. 등산 코스가 좋아 찾아오는 청년 학생들이 많다. 그때는 함께 동산을 한단다. 서울의 본당 단체나 레지오ㆍ마리에 혹은 JOC 회원들이 물압산장에서 밥을 해 먹고 하루를 놀다 가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한편 반갑지 않는 방문객도 있단다. 노 대주교는 매월 3째 주일이면 안양교도소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그래서 출감자들이 찾아와 노자를 요구하기도 하고, 취직이 어려운 사정을 호소한단다.『그럴 땐 참 딱해』하며 노 대주교는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어떤 때는 피부병 약을 달라는 사람도 있단다.
「몰압」의 뜻을 묻자『오리가 떨어진다는 沒압인데, 慕洛의 와전이라는 사람도 있어. 서울을 바라보며 洛陽 즉 임금을 사모했다는 故事에서 나왔다는 거야』노 대주교의 설명이다.
생활비는 서울대교구에서 지급하는 10만 원과 외국에서 보내오는 성금 및 미사 예물로 충당되는데 「성라자로 마을」의 극빈자 생활과 학생들의 등록금을 남몰래 보조하고 있단다.
노 대주교는 서울에 오면 마포구 합정동 376번지 31호, 2층 집에 기거한다.
이 집은 일본에 있는 한국연구원(원장=최서면씨) 본부인데 노 대주교는 그 재단이사장으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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