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일기」(己亥日記)는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한 순교자들에 관한 열전체와 일기체의기록이다.
1784년에 들어온 가톨릭은 당시 재래의 봉건적 윤리에 어긋난다 해서1801년 한 차례의 박해를(辛酉敎離) 받았으나 본격적인 박해는 기해년에 일어났다.
이때 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자신도 곧 잡히게 될 것을 예견, 서울의 이름 있는 심복 교우 즉 정하조, 현경운, 이경천, 최비리버, 현석문 등에게 순교 일기를 계속 쓰도록 명했는데 이들 손에 의해 쓰여진 순교 기록이「己亥日記」이다.
기해일기는 78명의 순교자 행적을 증언을 토대로 순교 년월일의 순서로 적어 놓았는데 수록된 사실의 대부분을 목격한 당시의 신자들이 사실임을 입증한 점에서 정확하고 상세함을 인정 받는 기록이다.
시복에는 순교 사실에 대한 증거가 완전해야 하며 그것이 목격자의 증언이 아니면 어렵다. 1847년 79위 시복을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기해일기라는 동시대인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며 당시 한국이 아직 박해시대에서 규정된 사건 조사를 할 수 없었던 교황청은 시복 절차에 필요한 최초의 심사를 이 기록으로 대신했었다.
현석문 등이 1842년까지 자료를 수집 정리한 기록은 1845년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다시 증언을 첨가, 불어로 옮겨 개정 증보판이라고 볼 수 있는 제2의「己亥日記」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기록은 필사본으로 읽혀오다 1905년 7대 교구장 뮈뗄 주교가 활판본「긔히일긔」를 발행함으로써 더욱 널리 읽혀졌고 학계에 소개되기는 1930년 日人 학자 山口正之에 의해서였다. 기해일기는 서울의 순교자만을 다루어 지방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고 기해년 순교사에 관해서는 다볼리 주교의 비망록ㆍ시복 수속시의 증언록 등 여러 문헌이 남아 있어 사료적 견지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사학자들은 이 방면의 최고이며 최초의 기록으로 이후의 수집과 정리가 계속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선구적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박해 속에서 이러한 기록을 남김으로서 순교자들을 현양한 선조들의 열성과 노고를 다시 한 번 생각케 하는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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