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지난 30ㆍ31일 양일간 해인사 청운장 호텔에서 가진 대구대교구 가톨릭아카데미(회장ㆍ황기석 박사) 세미나에서 주제 강연을 맡은 김경환 신부(대건신대 교수)의 강연 내용이다. 교회의 미래상(이상형)을 추구하여 현실을 반성하고 변천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주고 있다. 강연 내용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註)
도대체 이러한 제목을 들고 나서는 그 자체가 두 가지 교만을 범하고 있다.
첫째는 일 초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주제에 미래를 감히 논해보려는 시도인 것이다.
말하자면 자칭 예언자 역을 해보겠다는 우둔함을 면할 수가 없다.
물론 예언자라면 교회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여하는 하느님을 대변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고귀한 직분의 소유자라는 뜻도 있지만 예언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 맞출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뜻도 있는 것이다.
교회의 미래상을 어김없이 예언할 수 있다고 자처한다면 그는 교만하다는 평을 면치 못할 것이 틀림없다.
둘째는 미래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미래는 아직 있지 않고 앞으로 있을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래는 무와 유를 지니고 있는 애매한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에게 속해 있는 영역이 아니다.
좀 더 영성적으로 말한다면 미래는 하느님의 영역이고 사랑의 영역이다. 칼ㆍ라너는 말하기를『사랑은 미래를 맡기는 것』이라고 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할 때 미래를 조건에 걸고 맡기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사랑이 결하여 있다.
『당신이 만약에 파산을 한다면、당신이 만약에 폐병이나 문둥병에 걸린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소』
『헤어질 수밖에 없오』한다면 여기에 사랑이 있다고 아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미래도 조건도 없으면 미래는 바로 조건이기에 현재로서 조건 없이 만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미래상을 논한다 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소치이고 동시에 신의 영역 즉 사랑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무시하는 소치이다. 이것 또한 교만의 짓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미래상을 연구하는 것이 전혀 무의미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 강연을 허락하기도 했지만) 미래상이라고 해서 반드시 교회는 미래에 이러이러할 것이라고 예측해 보는 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이상형을 추구하여 현재를 직시해 보려는 노력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으며 또 틀림없이 다가올 미래의 사회와 정치 경제의 변화에 교회가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미리 예측해 봄으로써 교회가 당황하지 않고 현실에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성은 다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향산건일씨는「미래학」에서『우리들은 미래를 전망하고 거꾸로 미래의 싯점에서 현재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실제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불완전한 표현이다.
그 이유는「미래의 싯점」이란 실체가 아니고 가상이다. 가상을 갖고 실체인 현재를 평가할 수는 없다. 이것은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주의에 흐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미래의 싯점이란 역시 현재에 있는 인간이 바라는 바 이상형을 갖고 현재를 직시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어떤 목적을 향해 있는 만큼 그 목적이 설정되어야만 그 행위의 가치와 당위성이 성립된다고 볼 때 인간 행위를 더 인간적 행위로 만들기 위해서는 미래라는 방향을 설정해 두는 것이 대단히 요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미래의 싯점」이란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 하느님이 원하시는 관점에서 현재를 보자는 것과 같은 것이 되며 이것은 신앙인은 계속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점이다.
따라서 교회의 미래상을 연구하는 것은 오늘의 신앙을 더 두텁게 하려는 욕망이 곁들일 때 그 의의가 생생하다 하겠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은 교회란 지상에서 멀리 떨어진 구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 안에 인간과 밀접하게 부착되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인류가 겪는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인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변해가는 인류 역사에 대해 교회는 이방인으로서 존속할 것인가 아니면 그 변화에 대한 주도 역을 맡을 것인가 하는 것은 교회에 주어진 큰 과제이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류가 겪는 고민도 없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 상실이라는 문제이다. 아마도 교회는 지금보다도 미래에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과학 문명이 극도에 달하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더 많이 산적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지금부터라도 생각해 두어야만 막상 미래가 닥쳐왔을 때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미래학이란 새로운 학문이 과연 학문이냐? 향산씨는『미래학이란…조작 가능한 미래라는 관점에서 미래의 사회와 인간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구상하고 설계하는 것을 과제로 하는 새로운 방법』이라 했다. 그래서 『미래학은 정책 과학뿐만이 아니라 윤리나 종교의 문제와도 깊은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는 특수한 성격의 학문으로 된다』고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미래라는 관점」이다. 결국 관점에 따라서 미래는 초록일 수도 암흑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낙관이냐 비관이냐에 따라서 미래학은 완전히 좌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사실을 두고도 그 진행 과정을 예측하려고 할 때 관점에 따라 미래를 분석하고 구상하고 설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라는 대상 자체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고 미래학이 관측하는 대상은 역시 현재의 사물 그 자체이다. 현재의 사물에다 어떠한 방향을 부여하는 것을 미래학이 행하고 있다. 그래서 미래학을 학문이라기보다는 공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향산씨도 말하기를『자칫하면 미래학은 새로운 형태의 신화에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하고 자문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미래학자들은 낙관주의자들로 나타난다.
현재에서 이루지 못하는 바람을 미래에 투영해보겠다는 것이 그들의 의도처럼 나타난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 본능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꾸어 말하면 미래학에 관심을 둠으로써 우리는 낙관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낙관주의자가 되어야지 공상만 하는 낙관주의가 되어서는 안 되겠으며 미래를 준비하는 태도를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비록 낙관 비관 어느 한 쪽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최대한으로 낙관과 비관을 초월하여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면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역사가의 기본자세와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미래학은 역사학의 한 분야처럼 보이기도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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