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와인병이 하나、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 봉지들, 그리고 둘둘 말려진 휴지 뭉치들.
커피잔은 토요일 저녁의 흔적을 드러내주는 듯 검은 커피 자욱을 말라붙은 채로 보여주었고 거기엔 얼핏 내려앉은 먼지도 보이는 것이었다.
누군지 벌써 서류 뭉치를 어질러진 형화의 책상 한 모퉁이에 잔뜩 쌓아놓고 돌아갔다.
형화는 김 부장이 담배를 붙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미스 조도 한 대 태우겠어?
형화가 영문을 몰라 김 부장을 쳐다보았더니
-뭐 그렇게 놀라는 척 할 건 없어 하며 묘한 웃음을 짓는다.
형화는 과연 웃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를 모르고 계속 정리를 하다가 문득 커피잔 한 모퉁이에 구겨진 담배 꽁초 두어 개에 시선이 닿았다.
그건 토요일 저녁 어스름해진 무렵 순찰 돌던 경비원이 잠시 들렀다가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쉬는 사이에 형화네 둘의 이야기에 참견하면서 피우고 간 것이다.
담배꽁초는 철저하게 끝까지 모두 타 있었다.
형화는 그제서야 가슴이 철컹해왔다. 그러나 지금 김 부장에게 무슨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오늘 아침 한강에서 사고가 나서 늦었어요. 라는 말을 할 수 없듯이 이건 내가 아니라 경비원이 피운 것이에요. 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잡한 책상이 이미 그렇게 만들어버리고 만 것이 아닌가.
형화가 학교에 다닐 때는 화학시간이 제일 싫었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어떤 필요에서 그런 공부를 강요 당하는 것인지를 좀처럼 알아낼 수 없었다.
게다가 숙제라도 내주는 날엔 도무지 밤 새워 골치 아프게 적어내려갈 이유가 없는 것을 다만 해야 하는 거니까 성적에 들어가는 거니까 라는 생각에 할 수 없이 해내곤 하는 것이었다. 형화는 아침마다 시간과 씨름하듯이 출근해야 하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매일 계속되어지는 이 일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있다.
그냥 해야 하는 거니까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살고 있을 뿐이다.
따르릉.
-여기 삼 층 텔렉스실인데요、텔렉스 들어온 것 있으니 받아가세요.
-네、알았습니다.
형화는 서둘러 정리를 하고나서 텔렉스를 받아올 모양으로 문을 열고 나섰다.
바로 그때 또 한 번의 전화가 따르릉 울려왔다.
이미 거리가 떨어져 있었으므로 김 부장이 수화기를 들었는데 저쪽의 목소리가 어찌나 호탕하게 큰지 형화는 가까이 다가갈 필요가 없었다.
-여보쇼、거기 조형화란 여자 있소?
김 부장은 대답도 않고 다시 한 번 묘하게 웃더니 수화기를 형화 쪽으로 건네는 것이었다.
몇 발짝 걸어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어렴풋이 상대가 누군지를 짐작하고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을 뿐인데 또 한 번 크단 소리가 들려왔다.
-헤이、참새. 아침에 잘 도착했어?
걱정돼서 걸어보았지. 어때 약속대로 점심 살 테니까 이십 층 라운지로 나오라구.
철컥. 상대방은 수화기를 놓았다.
형화는 한마디 말도 않고 그것이 경민이라는 것을 알았다.
웅웅거리며 들리는 전화 소리를 김 부장도 들었을 게 뻔한 일이었다.
형화는 이제 별수 없는 아이라는 체념 비슷한 기분으로 방을 나와 삼 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두 명의 남자가 심각하고 조용한 말투로 무슨 이야기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거…주지스님이 뿌려댈 때는 정말 코끝이 시큼해지더구만.
비는 철철 내리는데 말이야…
-정말 아까운 사람이었지. 그렇게 허무해서야 어디 살맛이 나겠소.
-그 부인이 울어대다가 기절을 하는 모습은 정말 안 됐더군.
-그래 일요일은 그 일 시중 드느라고 아무 일도 못했겠구만.
형화는 누군가가 다쳐서 절에 요양을 들어갔든지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삼 층에서 내렸다. 그들 두 남자는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도 여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텔렉스는 아프리카의 잠비아와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온 것들이었다.
지난번 계약했던 내용과 동일한 상품을 보내주기 바라며 보내기 전에 언제 도착하는지의 날짜 등을 상세하게 알려 달라는 내용 등이었다.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하면서 형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쓸데없는 노릇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무실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일들을 하고 있었다.
형화는 그들 곁을 스쳐 지나 비서실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손잡이를 돌릴 필요도 없이 문은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순간 열려진 문 사이로 격의에 찬 말소리가 들려왔다.
-불량하단 말입니다.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소.
정 그렇다면 김 부장 주장대로 지각을 체크해서 내게 보고하든지 행동 사항을 경고하든지 하면 될 것 아니요.
-저는 그렇게 불성실한 직원과 한 방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그러면 어쩌자는 거요?
-결혼할 것을 권하면서 사표를 쓰게 하십시요.
-사표?
최 상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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