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화는 막연한 모욕감을 느끼면서 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표를 쓰라니、이건 너무 심한 개입이 아닌가.
형화는 용기를 갖고 그러나 쭈볏쭈볏대면서 말을 꺼냈다.
-김 부장님、밖에서 들어오다가 하시는 말씀 들었는데요…
텔렉스 용지를 가볍게 내려놓고 최 상무와 김 부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형화는 자기 책상 위에 올려쌓인 일거리만한 정도의 무게로 문득 어떤 말도 어떤 방법으로든 꺼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몇 번 실수로 저질러진 지각으로 결혼이며 사표에 결부시켜 극단적으로 생각하실 건 없지 않겠습니까.
-오해하지 마시오. 여기는 신성한 직장이지 놀이터가 아니란 말이오.
몇 번 실수로 저질러진 지각이라니、그렇게 말하기에 미스조는 너무 상습적이란 말이오.
-김 부장님、상습적이라니요. 제가 무슨 범죄자라도 되는 취급이네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이건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만 해도 말이오、그게 뭐야.
형화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의 잘못을 들추이는 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김 부장의 불결한 오해가 비로소 벗겨지기 시작하는 것을 끝내 지켜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흥、내가 들어오기 전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단 말이오?
최 상무가 물었다.
-미스 조、거북스러울테지만 그냥 들어줘야겠어요. 그래야 뭐 없었던 일을 꾸며대는 건 아니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 상무님、오늘 아침에도 십여 분이나 늦고서도 이렇다 사과하는 말도 없이 밖으로 나돌아 다니고、벌써 두 번째 벌어진 일인데 아침부터 남자와 전화가 오고가고.
김 부장은 흘낏 형화를 쳐다보더니 말을 계속한다.
-내가 뭐 꼭 사생활을 들춰내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의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까. 어쨌든 좋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그렇게 지내고 어찌 능률적으로 다음날의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김 부장님 그건 오해일 수도 있어요.
형화는 약간 웃는다.
-오해라구? 아침의 전화가 그 증거는 아니란 말이요? 더 이상 상습적인 방법으로 나를 희롱하지 마시오. 이젠 안 넘어간단 말이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만. 바쁜데 아침부터 쓸데없이 옥신각신하지 맙시다. 그리고 미스 조에게 무슨 전화가 왔는지는 모르지만 아침에 미스 조와 나는 한강 다리에서 교통마비로 고생하다가 늦은 사람들이오. 그만둡시다. 그리고 바쁜 일을 마무리 짓고 난 후에나 다시 이야기하든지 하는게 좋을 것 같소. 세무서에서는 언제 또 나온다고 했소.
김 부장은 어릿어릿한 표정으로 열시반경에 나온다고 했습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최 상무와 동시에 책상으로 돌아가 앉아 묵묵히 일거리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형화는 타이프라이터의 뚜껑을 열고 빠른 속도로 눌러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무실은 정적 속에 빠져들었고 다만 형화의 손짓에 따라 이루어지는 타이핑 소리만 퍼져나갈 뿐이었다.
웬만큼 일을 계속하고 있는 도중에 세무서 관리들이 들어와 모두들 굽실대고 시원한 차 날라 들여가고 온갖 서류 갖다 바치고 네네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난리를 한참동안 치루고 난 뒤 점심이나 드시고 가시지요 하는 최 상무의 말에 모두들 우루루 몰려나갔다.
어질러진 결재 서류를 마무리 짓고 있을 때 김 부장이 말을 건네왔다.
-미스 조 언제부터 최 상무와 그런 사이요? 그걸 몰라봬서 정말 죄송하오.
형화는 이 약속된 듯이 연속하고 있는 오해를 어찌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 부장님 제발 부탁이예요. 그 거짓 미움 따윈 이제 털어버리시고 진심으로 대해주셨으면 해요.
형화는 오늘 문득 말문이 열리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지난 일은 가볍게 잊어버리시고 있는 그대로의 조형화를 보아주세요.
-고약한 말씀을 하시는군. 내가 그럼 미친 놈 같이 말하고 있다는 거요?
-그렇다고 진심은 아니잖아요.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의 불길이 꺼지지 않은 것 아니에요.
-후후.
김 부장은 비양대며 뻑뻑 피워대던 담배를 힘있게 부며 끄면서 똑똑히 대답했다.
-자만심에 빠져 계시는군. 이 김학중이가 조형화 따위에 꿈쩍이나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형화는 벌써 2년이 넘어가는 날들 속의 일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날들에 살았던 정중하고 배려심 많은 김 부장의 모습을 기억해보았다.
그렇다. 김학중은 혼자 굿을 하면서 복수의 신을 요란하게 불러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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