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이라고 하는 더위 속에서 피서는커녕 매일 이 같은 잡문(雜文!)에 몰려 닭장 같은 아파트 속에서나마 하루도 땀 식힐 시간이 없는 나에게 납량(納凉)수필 이것도 올해만 세 번째 쓰는 글이니 밥 먹고 사는 천만 가지 일(爲食千萬事) 중에 내가 왜 글쟁이가 되었나 하는 짜증이 없지 않으나 한편 저 뙤약볕 거리의 빙과 장수들보다야 훨씬 수월하고、아니 저 한재(旱災)지구 가뭄에 타들어가는 논밭에서 물고를 트려고 비지땀을 흘리는 농부들을 떠올리면 이런 투정이 쑥 들어가고 오히려 자기의 과분한 처지가 송구스럽기마저 하다.
그래서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시원하게시리 바다 이야기 그것도 우리나라의 첫 손꼽히는 해수욕장인 원산의 송도원과 명사천리 이야기나 할까 하는데 내가 이맘때면 자타의(自他意)에 의해서 거의 같은 내용의 글을 거듭 쓴 적이 있는지라 혹시 중복해 읽는 이가 있더라도 얼음냉수 거듭 마시는 셈치고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남빛 바다에 뜬
하늘을 타고 헤엄치다
푸성귀마냥 퍼래져서
찰싹이는 파도 이랑을 넘어
베폭처럼 펼쳐진 모래밭에 올라가
지글거리는 태양을 깔고 덮고 딩굴다가
해당화 붉은 울타리 넘어
제물 遮日의 솔숲으로 들어서
그 푸른 그늘 아래
왕성한 食愁을 채운다.
나의 失鄕、나의 失樂園、元山 松濤園!
-졸시 「失鄕의 바다」 1절
여전에 망향(望鄕)에 못 이겨 끄적여본 것이지만 나의 무딘 붓으론 실경(實景)의 아름다움을 도저히 나타낼 수가 없다. 마냥 짙푸르고 마냥 싱싱한 동해의 그 생명감과 해방감! 그 이글거리는 태양이 내리쬐는 백사장의 순수한 열기(熱氣)와 낭만!
거기다가 청정(淸淨)한 안식을 주는 솔숲의 그늘과 바람 특히 그 솔숲의 아름다움은 비할 바가 없다. 그래서 지중해의 열사(熱沙)의 바다를 현존(現存)의 피안(彼岸)으로 그린 알베르 까뮈에게 쓴 나의 글발 형식의 시 귀절에서
(前略)
짐짓 우리 本鄕 實存의 마음엔、솔숲、내 元山 바다와 같은/솔숲을 두어야만 쓰느니/그리고 가끔 죽음과 같은/서늘한 그늘에 쉬어야만 하느니/
친구여! 西洋 친구여!
拙詩「失鄕의 바다」一節
라고 마저 적어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명사십리를 그린 시로는
파란 스카트를 걸친/명주빛 젖무덤에다.
흰 타올을 두른 銘鉉爐 가슴이 黃金빛 정열을 퍼부어 天地가 눈부시다.
拙詩「失鄕의 바다」一節
거친 모래들을 모두 채로 쳐서 버린 듯 보드랍고、고운 설탕 같은 모래만이 장장(長長) 10여리나 깔려있고 그 언저리에는 해당화가 붉게 피어있는 명사십리、그 풍랑 속에 들면 천지가 그 채로 황홀했다.
바로 그 고장에서 청소년 시절의 아롱잔 꿈을 안고 딩굴던 나는 그 바다、그 모래밭、그 솔숲、그 탈의장(脫衣場) 테니스장 베비골프장、식당 여관 …어느 한 군데 눈에 선한 추억을 안 담은 데가 없다.
지금은 공산당들의 휴양소인가 뭔가로 쓰여서 일반에겐 폐쇄 상태라고 듣고 있으나 그 진부(眞否)는 모른다.
이런 회상의 납량(納凉)도 청고매수(請稿枚數)가 다 되어 현실로 돌아온다.
선풍기마저 더운 바람을 내는 나의 서재에서 눈에 비치는 것은 막막한 활자(活字)의 바다다. 나의 잃어버린 고향 바다! 나의 비잔티움엔 언제나 돌아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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