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어느날-. 사무실로 육순 할머니 한 분이 찾아오셨다. 들어서자마자 땅이 꺼지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마루 바닥을 치고 넋두리를 섞어가며 통곡하신다.『그래, 이럴 수가 있습니까? 회장님, 열아홉에 청상과부 되어 아들 하나 믿고 살았는데 어린 손자 두 놈을 어찌하라고 그 애비를 이렇게 일찍 데려가시다니-. 하느님도 야속하시지…으흐흐』
60여 성상을 애오라지 한 점 등불 향해 수많은 날들을 슬픔과 고독을 씹으며 저렇게 등이 휘도록 살아온 숙명의 여인! 그녀에게는 열녀문도, 값 싼 칭송도 주어진 바 없었다.그저 사회 구조가 물려준 하나의 사상과 모성만이 지워준 멍에를 지고「아들 하나 기른다」는 보람에 살아왔다. 그것이 그녀의 신앙 전부였고 그녀의 전 세계였다. 그녀는 그것 안에서만 하느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험한 일로 마디가 굵어진 저 손으로 인생의 모순을 어루만지면서도 그것을 인식할 때 오는 방황마저도 끝내 가져보지 못하고 저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그녀 나름의 신앙 안에 순수하였고 닫혀진 벽 안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신앙의 대상이 영영 사라져버린 것이다.
허탈에 빠져 몸부림치는 그녀를 위로하기에는 내 언어가 너무도 무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저 그의 두 손을 꼭 쥐어드리고 말을 잊었다.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와 모순되는 사건들을 가끔 직시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주님! 어찌 하시고려고 이러하십니까?』하는 신앙의 가장 원초적인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은 한 없이 착하신 분! 하느님은 사랑의 원천! 하느님은 자비의 아버지. 이러한 교리교수법상의 명제가 실행활에서는 정직하게 말해서 가끔 갈등으로 변해온다.『너희 인생의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니라』(이사야 55ㆍ8) 하신 말씀으로 억지로라도 합리적 사고(思考)로 끌고 가기는 했지만 이 노파의 비통으로 어두워진 마음이 밝아오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성인 교리반 교리 준비를 하려고 시청각용 대형 성화(聖畵)를 고르고 있었다. 이것저것 찾다가 한 장의 그림에 시선이 끌렸다. 이상히 여겨 그것을 따로 꺼내 놓고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환하게 마음이 밝아져옴을 느꼈다.
독일 화가 퓨겔(FUGEL)이 그린「노아의 홍수」. 온 세상(?)이 물로 덮여 있고 저 멀리 폭풍우 속에「노아의 방주」가 광채 속에 홀로 떠 있다. 오른쪽 마지막으로 조금 남은 땅덩이 위에는 벼락 맞은 고목이 하나 우뚝 서 있고 그 위로 징그러운 큰 뱀이 칭칭 서려 있다. 그 밑으로 칠죄종(七罪宗)을 표상하는 마지막 인간들의 죄악상이 아비규환 속에 끔찍하게 그려져 있다. 볼수록 앙징스럽고 처참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위를 우러르지 못한다. 그저 목숨이 다할 때까지 땅만을 향하고 있다. 땅의 것만을 주목한다.
그런데 이 벌 받아야 마땅한 가증스러운 정경 속에 이해되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 갈가리 찢긴 옷을 걸친 어머니가 두 아기를 양팔에 부둥켜 안고 정신 없이 방황하고 있다. 물은 점점 더 불어나고 비바람은 더더욱 세차게 몰려오는데 쾡하게 뚫린 어머니의 시선은 촛점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두 아기를 끝까지 끌어안고 있다. 왜? 어째서? 이런 모성의 아름다움이 마지막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도 찬양되는 어머니 사랑! 그 아무 것에도 비길 수 없다는 모성의 위대함이! 이런 끔찍한 심판의 대상이 된다니-.
그렇다! 신(神)은 우리에게 있어 절대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 사변세계의 절대 극점은 신께로 향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진리요 길인 것이다. 그 밖에 그 어느 것도 우상에 불과한 것이다.
슬픈 모성 안에도, 성성(聖性)이라 지칭되는 통속 관념 안에도 우리가 즐겨 찾는 미학적 요소 안에도 많은 구멍은 있는 것이다. 시적(詩的) 세계가 그러하고 선률과 율동이 그러하다. 그러기에『신앙은 철저한 체념으로부터 그 문에 도달하고 거기서 끝없는 상승작용을 하는 용사들의 것』(키에르케골)이라 하는가? 그리도 애끓는 모성도 아집의 범주에서 벗어나 승화될 수 없다면 홍수의 심판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무서움으로 떨려왔다.
한 많은 저 육순의 노파도 철저히 생을 뒤돌려 놓고 자기 안에서 새 하느님을 찾아 숨 가쁜 나그네길을 홀로 떠나야 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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