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화는 손을 기계적으로 움직여 재빠른 솜씨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어쨌든 일을 하고 나서 생각해볼 문제라는 결정을 내렸다.
오늘 할당량만큼의 일을 해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건 직장이 아니다. 그건 가정집이나 마찬가지에 불과하다.
편히 쉬고 싶다거나 문득 낯선 곳을 배회하고 싶다는 감정 따위는 절대 금물이다.
더구나 기분이 상했다거나 해서 일을 내팽개친다든지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힌다고 서성대는 것은 직장생활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 직장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의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신성한 곳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이익이나 편함만을 내세워 이 경건한 뜻을 그릇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입사 후 몇 주일 간의 신입사원 훈련을 마치는 기념식에서의 최 회장의 당부였다.
-신성 좋아하시네. 적당히 알아서 편안한 것이 직장에서 가장 경건한 목적이라구.
형화 뒷좌석에 앉았던 어느 남자 사원이 최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픽픽 웃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질을 했다.
그때 형화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최 회장이 이 소리를 들었을까봐 조바심 나는 것보다도 그 말이 참 훌륭한 내용이라고 감탄해하며 앞으로 직장에 충실할 것을 결심하는 자신과는 너무도 판이한 태도였으므로 심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흰 와이셔츠에 평범한 넥타이를 맨 그 남자 사원과 눈이 마주쳤을 때 형화는 뭐 이따위 몰상식한 녀석이 다 있어、하는 표정으로 노려보았고 그는 아이쿠 죄송합니다 하면서도 어렴풋이 너 따위 풋나기가 무얼 알고 까부느냐는 듯한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까딱여 사과를 표했다.
형화가 직장 일을 시작하면서는 최 회장의 당부마따나 개인을 죽이고 회사 전체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 나를 위하고 나아가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는 사명감에 불타 올랐다.
여기에 보다 철저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 다름 아닌 김 부장이었다.
을지로 입구 깡마르게 높이 치솟은 이십일 층의 건물의 두 개 층을 대여받아 사무실을 차리고 있는 이 무역회사는 사원이 모두 백여 명에 가까왔다.
여섯 개의 각 부(各部)는 무역 제반에 필요한 분야를 분할 담당하고 있었는데 형화는 우연히도「참하다」는 평을 듣게 되어 비서실로 근무 배치를 받게 되었다.
대재벌의 비서실이 아닌 바였으므로 붉은 카페트가 깔린 회장실을 제외하고는 별달리 큰 규모가 아니었다. 무역에 정통해 있는 성 전무가 실무의 최고 책임자 격으로 최 상무와 함께 회장실 한 모퉁이에 책상을 놓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비서실에는 김 부장과 형화ㆍ그리고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에 뼈가 굵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가씨 하나가 맡고 있었다.
-공적인 일에 사적인 문제를 결부시키는 사람처럼 무능력한 자도 없소.
책임 완수를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 첫째 방법은 시간 엄수.
형화는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뛰어넘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완성의 길이며 모두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될 수 있는 한 회사 일에 충실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갸륵하게 보아온 김 부장은 형화에게 점점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고 때때로 저녁을 그리고 얼마 후에는 생맥주 한조끼씩 사주는 날들이 늘어갔다.
서류를 철하려고 들었던 클립이 사무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리를 몹시 굽혀 집어들면서 형화는 입사 무렵의 회상으로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열심히 일을 해? 나를 잊고 회사의 일만을?)
그리고 순간적으로 일에 대한 무의식적인 충동이 전혀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 특히도 김 부장이 불어넣은 세찬 입김이었음을 깨달았다.
맥주 몇 컵에 얼큰히 취기가 감돌던 어느 날 김 부장은 정체불명이었던 자신의 신상문제를 독백하듯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고아였다는 것이었다.
노모님이 계신다고 하였잖아요. 그리고 효자라고 자랑하셨잖아요. 그래도 김 부장은 고아라고 했다. 그러니까 노모님이라는 분은 한마디로 양어머니였던 것이다.
형화는 그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숙연한 심정으로 점차 눈이 충혈 되어가며 취기를 더해가는 김 부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남들이 고통스러웠던 이야기 그것은 행복과 평화로 다듬어진 형화의 마음으로는 숙연하게 받아들여야 마땅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였는데도 나는 칙칙하고 검은 고아원이 싫어 미칠 지경이었어. 그래서 여덟 살 무렵에 고아원을 도망 나오고 말았지.
-그럼 어디서 어떻게 무얼해서 살았어요、이런 나이에?
-그때 내 주머니엔 몇백 원의 돈이 있었지. 미리 도망 나올 계획으로 여기저기서 푼푼이 생겨지는 돈을 십 원 이십 원 모았던 거야. 그걸로 나는 껌을 팔기 시작했어….
그렇게 시작된 김 부장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형화의 좁은 경험으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세계로 엄청난 충격을 주는 이야기가 계속되었지만 언제가부터는 숙연한 밑바닥에 지루한 하품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 부장이 노모를 만난 것은 어느추운 날 꽁꽁 얼어붙은 한 길바닥에서였다.
한 여인네가 쓰러져서 신음 소리를 내며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껌팔이 소년이 목격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손바닥만한 통 속에 넣었던 껌들을 옷에 달린 주머니마다에다 집어넣고 그것도 모자라 다 헤진 털쉐타의 안쪽으로 집어넣고 나서 두 손으로 여인을 부축했다.
그래서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두 시간 남짓을 걸어 돈암동 산꼭대기의 조그만 단칸방에 다달았고 여인과 소년은 심한 피로감 때문에 미지근한 방바닥에 쓰러져 곧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형화가 더한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것은 며칠 후 계속되는 김 부장의 차분한 말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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