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위하여 조건을 정비한답시고「구하고 그리고 없는」시늉을 합니다. 만약에 그 구하는 것과 없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겸손이 되고 위선이라면 아첨이 되는 것입니다.
무릇 아첨은 겸손을 가장하는 법이며 결핍과 가난과 불완전과 무지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흔히 아첨을 겸손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은 그 내용이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진실이냐 허위이냐가 문제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 겸손과 아첨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경계하는 말과 교훈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과 아첨은 어떻게 다를까요?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의 의도가 직접 거래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참사랑의 요건으로서 겸손이 될 수 없습니다.
예컨데 명랑하지 못한 후진적인 상거래 양상에 있어서 진정한 겸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물질 위주 현금 위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그 부모가 자식을 귀엽게 사랑으로 기른다고 하더라도 혹은 아무리 성심과 정열을 기울이고 인격과 지식 기술을 구비하여 생도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도 자기가 주는 행위에 보수를 앞세우고 하는 행위라면 참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효도를 강요하는 부모나 또는 존경과 우대를 강청하는 교사는 역시 참사랑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논리가 사랑을「받는」자세에 있어서는「겸손」에 해당됩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사랑의 은혜가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이고 물질적일수록 그것은「겸손」의 탈을 쓴 「아첨」인 것입니다.
그래서「주고받는 행위」로서 사랑은 비록 거래적인 의미로 해석되더라도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적으로 보다 길게 공간적으로 보다 널리 통용되는 거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의 모형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당신들은 생활 태도를 바꾸시오. 그리고 어린이와 같이 되시오. 그렇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입니다』(마태오 1ㆍ2~5)
어린이와 같이 순진하고 어린이와 같이 약하고 어린이와 같이 귀엽고 어린이와 같이 유연하며 어린이와 같이 가능성이 풍부하고 어린이와 같이 불완전한 사람 그런 사람이 겸손의 표본인 것입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