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의 나이로 어린 아이와 같은 동안의 할아버지 김명한씨.
그는 의사이면서도 무형문화재 제24호인「차전놀이의 기능보유자」로 등록되어 있다.
칠십 평생을 인간 상록수로 불우한 이웃을 도웁고 지방의 문화 보존을 위하여 헌신해온 김명한씨.
그는 오늘도 경상북도 안동의 곳곳을 다니며 줄기차게 그의 꿈을 실현하고 있다.
김명한씨는 오직 안동에서 나서 안동에서 자란 안동의 시민이다.
내 손자 남의 손자 할 것 없이 모든 어린이들은 김명한씨를 친할아버지처럼 따른다.
귀여운 손자들에게 둘러쌓인 할아버지는 아득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곤 한다.
부잣집 도령은 서당 선생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남달리 명민했던 그는 언제나 다른 아이들에 앞서 글을 깨쳤고 앞장서서 남의 일을 도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된 김도령은 차츰 서당에 취미를 잃고 강가 모래벌에서 혼자 서성대기 시작했다. 물론 집에서는 서당에 간다고 나왔지만 아이들의 냉대와 소외감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야 너 집 없니?』
『아니』
『그럼 왜 매일 같이 여기 나와 앉았니?』
다 떨어진 옷- 신발도 못 신은 맨발의 거지 소년이 김도령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들은 강가에서 뒹굴며 마음껏 뛰놀았다. 김도령은 기쁘기만 했다. 비록 비렁뱅이 거지애들이지만 서당 아이들처럼 자기를 시기하지도 않고 따돌리지도 않는 그애들이 얼마나 고마왔는지…김도령은 도시락을 같이 나누어 먹고 때로는 자기 책을 펴 놓고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거지애들의 움막은 비오는 날은 더할 수 없이 멋있는 놀이터였다.
그애들의 부모는 자기들이 얻어온 밥을 거리낌 없이 먹어주는 김도령이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더구나 아이들에게 글까지 가르쳐 주고 있으니 강가 거지들의 움막에서는 언제나 대환영을 받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김명한씨는 어려서부터 불우한 사람들의 이웃 되는 생활을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김도령을 밧줄로 묶어 뜰에 세우고 베를 짜며 종일 지켜보게 되었다.
뙤약볕 탓이었을까. 사랑하던 아들이 졸도하자 어머니는 며칠을 정성 드려 짰던 베를 가위로 짜르고 아들을 업고 한약방으로 달려갔다. 그때 어머니의 가슴 아파하시는 그 모습이 김도령에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교훈이 됐다.
극진한 어머니의 사랑과 엄격한 교육으로 김도령은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어머니는 안동의 민속놀이인「놋다리 밟기」를 주관했고 아버지는 안동의 민속놀이인「차전놀이」를 주관하시면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김명한씨는 대구로 나가 의사 공부를 시작했다.
가난한 이웃을 보고는 그대로 지내지 못하는 천성의 소유자가 되었다.
같이 굶어가면서 같이 고학을 하면서 가장 불행한 급우의 하숙 친구가 돼 주었다.
지나친 과로와 영양실조로 병석에 눕게 된 김명한씨는 결코 굴하지 않고 긴 투병생활을 하게 됐다.
의가사 되고,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된 그는 천애원이란 나환자 마을을 이룩하여 정기적으로 진단을 해 주며 그들의 이웃이 되어 준다.
그는 항상 말한다.『나를 보고 자선사업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선사업이라는 것은 남을 동정해서, 불쌍히 여겨서 베풀어 주는 사업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선사업이란 오로지 자신이 기뻐서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언제나 강가에서 거지 아이들과 함께 뛰놀던 그런 기쁜 마음으로 나환자들을 돌보고 부랑아들을 보살폈다.
6ㆍ25는 김명한씨에게는 누구보다도 큰 충격이었다. 나환자들을 피난시키다 총살 당할 뻔한 이야기, 무엇보다 집이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가보로 모아온 명화들이 재로 되어버린 사실은 김명한씨를 스스로 나라의 죄인으로 자처하게 만들었다.
수복이 되자 김씨는 그 죄를 씻기 위해 향토 문화 건설에 앞장 서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눈여겨 보아온 안동의 민속놀이 동채놀이 즉 차전놀이를 보급시켜 드디어 차전놀이가 무형문화재 제24호로 등록되고 자신은 그 기능보유자로 된 것이다.
차전놀이는 경북의 강인한 의지를 담고 협력과 단결을 고취시키며 그 지방 사람들의 큰 놀이로 발전이 되어 갔다.
이제는 전국 중고등학교에서도 이 놀이로 체력과 정신을 단련하고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로 보급이 되고 있다.
음력 정월 보름-1년에 한 번씩 벌어지는 거대한 이 민속놀이는 안동 사람뿐 아니라 전 민족의 문화 유산으로 전승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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