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수해는 너나 할 것 없이 겪는 아픔이었지만 그 중에도 여러 사람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 것은 4명의 일가족 모두를 잃은 어린 학생의 넋 나간 모습이었다.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시험공부를 하다가 참변을 면한 그 학생은 가족들과 함께 없었던 것이 오히려 잘못인 것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이 어린 학생에게는 먹을 것 입을 것보다는 부모의 사랑과 형제들의 우애가 더 필요할 것 같아 바쁜 중에서도 여러 번 찾아봤지만 그 학생은 매번 집에 없었다. 가족과 보금자리를 잃은 그곳에 머물러 있기가 괴로왔을 것이리라.
이 엄청난 슬픔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렸던 그 학생에게 따뜻한 관심을 계속 기울여야 하겠지만 모두가 슬픔 투성이었던 그때의 상황으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지금쯤은 장성한 어른이 되었을 그 학생은 물난리를 겪을 때마다 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나곤 했다.
비록 직접적인 수해는 겪지 않았지만 내가 살던 수녀원은 50년의 좋지 않은 역사를 지닌 매우 낡은 일본식의 건물이었는데 부엌이라고 명칭이 붙은 곳은 비만 오면 줄기차게 물이 고이는 아주 고질적인 수해지역(?)이었다. 본당 신부님은 비가 오는 날이면 아예 수녀원으로 작업을 나오셨다.
바지를 둥둥 걷어 올리시고는 물통으로 물을 퍼내주시곤 하셨지만 폭우로 순식간에 물이 고일 때는 도저히 감당키 어려워 장마철 내내 수중 부엌이 되곤 했다.
그러나 이런 불편에 대한 투정은 집과 재산과 가족을 잃은 다른 이들의 슬픔에 비해 볼 때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전에 집 없는 설움을 두 번이나 경험한 일이 있었다.
한 번은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우리 식구는 집ㆍ농토ㆍ과수원 등을 팔아 고향을 떠났는데 곧 그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신설 본당에 초대 수녀로 파견되었을 때였다.
성당도 미처 정리가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일학교 교실ㆍ회의실ㆍ사무실 ㆍ수녀원 등 부속 건물이 전혀 준비가 안 된 곳이었다. 다행히 도보로 30분쯤 걸리는 곳에 우리 수녀님들이 계시는 분원이 있었기에 수녀님들에게 신세를 지며 하숙 아닌 하숙을 하며 출퇴근을 했다.
약 4개월 동안 출퇴근을 하고 난 후 25평짜리 아담한 양옥집을 전세로 얻어 이사를 하게 됐다. 본당과는 거리가 멀긴 했지만 아침부터 밤중까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못했던 더부살이에 비하면 너무나도 황송한 집이었다.
본당 신부님과 교우들의 따뜻한 손길로 마련된 이 전세집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전망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집을 가졌다는 즐거움도 잠깐、새 살림을 시작한 지 6개월로 접어든 어느 날 집 계약 만기일이 다 되었으니 돌려 달라는 집주인의 갑작스런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집 얻은 기쁨과 새 살림 꾸미는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에 우리는 다시 짐을 꾸려야만 했다. 여러 날을 뛰어다닌 끝에 어느 교우의 소개로 겨우 집을 얻을 수 있어서 이사 날짜를 정했다.
공교롭게도 이사를 하기로 한 날 아침부터 비가 퍼부어 도저히 이사할 형편이 못 되었다. 이사를 도와주러 온 교우들과 함께 무리를 해서라도 짐을 옮기려 했으나 비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고 얼마 되지 않는 짐이지만 비에 상할 것 같아 포기를 하고 있노라니 집주인이 짐을 싣고 들이닥쳤다.
오늘 이사를 하기로 했으니 빨리 집을 비워 달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삿짐을 차에 싣고 계약한 집으로 갔더니 그 집에선 비오는 날 이사를 할 수 없다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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