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이신 한 하느님
1. 삼위이신 한분의 하느님… 교부들의 오랜 반성 끝에, 그 결과들은 공의회의 정의(定義)로 선언되었고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세「위격」으로 말합니다. 그 세 위격은 동일한 신석 본체의 일치 속에 자존합니다. 보에시우스가 유명한 정의로 적절히 밝혔듯이(Persona proprie dicitur rationalis naturae individua substantia) 「위격」은 이성적 본성의 개별 존재를 말합니다. 그렇지만 초기교회는 즉시 하느님의 지성적 본성이 위격들로 복수화 되지 않고 한분으로 남아 『세 하느님들이 아니라 유일한 한분의 하느님』(Quicumque신경)이라고 선포할 수 있다고 밝힙니다.
여기에 구별되는 세 위격과 단 한분의 하느님이라는 깊은 신비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위격은 셋이고 신적 본성은 하나이기 때문에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이성으로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각 위격이 동일한 하느님인데 어떻게 실재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가하는 어려움은 남습니다.
공의회의 가르침
2. 우리 이성은「관계」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더듬거리며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세위 격은 그들이 서로와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서만 서로 간에 구별됩니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성령과의 관계, 성령의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 구별됩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서 아버지는 순수 부성(父性)이고 아들은 순수 자성(子性)이며 성령은 그「둘」의 순수한 「사랑의 연계(連繫)」이므로 위격적 구별은 삼위의 동일하고 유일한 신적「본성」을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11차 똘레도 공의회(6백 75년)는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 밝혔습니다.『아버지는 자신에게 관계되지 않고 아들에게 관계되며 아들은 자신에게 관계되지 않고 아버지에게 관계되며 마찬가지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라고 서술되는 만큼 그분은 자신에게 관계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에게 관계 된다』(DS528).
그렇기 때문에 플로렌스 공의회(1442년)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이 세위격의 하느님은 한 하느님이다…왜냐하면 그 세 위격은 하나의 본체 하나의 본질, 하나의 본성, 하나의 신성, 하나의 무한성 하나의 영원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 안에는 모든 것이 하나이며 동일해서관계의 대립이 없다』(DS1330)
「자립적」 관계
3. 그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구별시키고 그들의 동일한 존재 안에서 실재적으로 그들을 서로에게 관계 지우는 이 관계들은 그 안에 신적 본성의 빛과 생명의 풍요로움을 모두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으로써 그들은 온전히 동일화됩니다. 그들은「자립적」관계로서 그들의 생명의 추진력에 의해진 교속에 서로를 만나러 나가며 그 친교 속에서 각자가 완전하게 타자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 사랑의 통교는 인간의 상호 인격적 관계의 특징이 돼야할 영적 자유와 성의(誠意)의 최고 모델입니다. 인간의 상호 인격적 관계는 언제나 이 초월적 모델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이에 관해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지적 합니다『주 예수께서「우리가 하나인 것처럼…모든 이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17, 21~22)하시며 성부께 기도 바치실 때 인 간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시야를 열어주시며 하느님의 삼위일체와 사랑과 진리 안에서 결합된 하느님의 자녀들의 일치사이의 어떤 유사성을 시사하신 것이다. 이 유사성은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줌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음을 밝혀 준다.』(사목헌장24).
신비 앞에 멍해지는 작은 마음
4. 세 위격의 가장 완전한 일치가 인간사이의 참된 친교의 모든 형태를 비춰주는 초월적 정상(頂上)이라면 우리의 생각이 자주 이 신비를 관상하는 것에로 쏠리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복음은 이 신비에 대해 대단히 자주 언급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면 족 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10, 30)『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요한10, 38)『내가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14, 10~11)
고대 교회 저술가들은 이 하느님의 위격들의 상호 침투를 자주 취급합니다. 상호 침투 또는 상호 내주(內住)를 희랍말로는 Perichoresis, 라틴말로는(특히 11세기부터) Circumincessio 또는 Circumessio라 말합니다. 폴로렌스공의회는 이 삼위일체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이 일치를 통해……아버지는 완전히 아들 안에 있고 완전히 성령 안에 있으며, 성령은 완전히 아버지 안에 있고 완전히 아들 안에 있다』(DSl331). 이 구별되는 하느님의 세 위격은 상호관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존재, 동일한 생명, 동일한 하느님입니다.
이 현기증 나는 신비 앞에 우리의 작은 마음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저절로 전례에 나오는 환호소리를 우리 입술에 올립니다. 『거룩하신 성삼께 영광 있어 지이다. 위격으로서는 동등하시고 모든 세기에 앞서 그리고 이제와 영원토록 한 하느님이시니』(성삼 대축일 제1만과 제 1입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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